본문 바로가기

삶, 사랑, 문학/[광장,청춘], [예스31],[ccmer] 칼럼

[예스31칼럼] 십자가와 역설




제목 : 십자가와 역설


쫓아오던 햇빛인데
지금 교회당 꼭대기
십자가에 걸리었습니다.

첨탑이 저렇게도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
종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데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
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ㅡ윤동주,「십자가」


일반적으로 ‘역설[paradox, 逆說]’은 자기 자신의 주장이나 이론을 스스로 거역하는 것을 의미한다. 역설은 흔히 ‘자기모순(自己矛盾)’이나 ‘자가당착(自家撞着)’과 같은 한자 성어로 표현되기도 하는데, 한 사람의 말이나 행동이 앞뒤가 서로 맞지 않는 상황에서 사용한다. 그러나 문학에서의 ‘역설’은 좀 다르다. 겉으로 보기에는 진리에 어긋나고 부조리해 보이지만, 실상은 그 속에 진실을 담고 있는 표현 방법이라고 설명한다.

‘이 컵은 사각형이면서 원형이다.’ 라는 말을 보고 잘못된 표현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사실은 컵은 보는 각도에 따라 사각형이 되기도 하고 원형이 되기도 한다. 옆면을 잘 맞춰 보면 사각형이고 위에서 내려다보면 원형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컵은 사각형인가? 원형인가? 이 둘 중 하나의 답만 선택한다면 컵을 단편적으로밖에 설명하지 못하는 셈이 된다. 오히려 사각형이면서 원형이라고 설명하는 것이 컵을 입체적으로 더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다. 모순된 말처럼 보이지만 실은 진실에 더 근접한 표현이었던 것이다. 인생이라는 것도 평면적인 것이 아니라 입체적이고 복합적이기 때문에 이것을 단편적으로 이렇다 저렇다 딱 부러지게 말하는 것이 오히려 거짓일 수 있다. 다시 말해 문학에서의 역설은 단순한 말장난이 아니라 인생의 진실을 담아내는 언어의 그릇이라고 할 수 있다.

윤동주는 「십자가」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괴로웠던’과 ‘행복한’이라는 상반된 형용사로 표현하고 있다. 워낙 유명한 작품이라 기계적으로 ‘역설법’이라고 생각하고 넘어가기 쉬운 구절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부분에서 십자가가 갖는 역설의 의미를 깊이 묵상할 수 있다.

1연에 등장하는 ‘십자가’는 교회당 꼭대기에 있다. 화자가 쫓아 온 햇빛이 그만 교회 지붕 십자가에 걸려 버리고 말았다. 그곳은 ‘저렇게도 높은’ 곳이어서 우러러 볼 수는 있어도 절대 올라갈 수 없는 곳이었다. 그는 좌절했으나 쿨하게 포기하고 돌아서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첨탑을 기어오르려 하지도 않은 채 근처를 서성거리기만 한다. 실패했다는 좌절감과 여전히 남아 있는 미련을 들키지 않으려는 듯 휘파람이나 불면서 말이다.

그런데 4연에서 다시 등장하는 십자가는 1연에서처럼 교회당 꼭대기 높은 곳에 있는 십자가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게 ‘처럼’ 화자에게 허락된 십자가다. 생각해보면 십자가만큼 높은 곳과 어울리지 않는 것이 없다. 예수 그리스도는 높고 높은 보좌를 떠나 죄인의 몸을 입고 이 땅으로 내려오셨기 때문이다. 윤동주는 그러한 성육신의 예수님 모습을 ‘괴로웠던 사나이’로 표현하고 있다. 윤동주의 작품에서 ‘사나이’라는 단어는 자주 등장하는데, 현실적 한계에서 좌절하고 방황하는 자신의 모습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다. 화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괴로웠던 사나이’, 바로 자기 자신을 발견한 것이다.

십자가는 원래 인간의 죄를 해결하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 표현이다. 인간은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였지만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의 몸으로 내려와 모든 인간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죽었고 또 부활하셨다. 그래서 이러한 사실을 믿으면 죄의 문제가 해결되고 하나님의 사랑과 계획을 알게 되며 또 그것을 체험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진리가 너무나 값지고 지나치게 은혜로워서 아무에게나 헐값으로 넘기고 싶지 않았는지, 인간들은 그만 십자가를 너무나 높은 교회당 꼭대기에 올려 보내고 말았다. 그래서 눈물을 글썽이며 우러러 보고 바라만 볼 뿐 예수 그리스도 ‘처럼’ 살고자 하지 않는다. 저렇게 고귀하고 순결하게 살 수 없을 거라고 말하면서 멀리서 구경만 하고 있는 꼴이다.

윤동주는 ‘괴로웠던 사나이’인 예수님을 떠올리며 깨닫게 된다. 자신이 추구해야 하는 것은 첨탑 위의 햇빛이 아니라 ‘어두워 가는 하늘 밑’이었음을. 자신에게 그 길이 허락된다면 괴로웠지만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 ‘처럼’ 살아갈 수 있으리라는 것을. 그래서 처음에는 광명을 추구하다 좌절하여 괴로워하던 화자는 반대로 어두워 가는 하늘 밑에서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조용히 흘리는 삶을 허락받기를 원한다.

패배와 죽음의 상징처럼 보이는 '피'가 결국 '꽃처럼 피어나는' 생명을 갖게 되는 것은 그리스도의 죽음이 부활로 연결되는 십자가의 역설이며, 어두워 가는 하늘 아래에서 그 피를 조용히 흘리는 화자의 모습은 이 역설을 인간의 삶에서 어떻게 실천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오늘은 예람제가 있는 날이다. 십자가 근처를 서성이던 이들에게 교회당 높은 지붕 위의 십자가를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어두워 가는 하늘 아래에서 조용히 모가지를 드리우고 있는 우리의 모습에 담긴 구원의 십자가를 증거할 수 있기를 바란다.

http://ss.godkid.net/asp/gongi/upimg/85_%EC%8B%AD%EC%9E%90%EA%B0%80%EA%B7%B8%EB%A6%BC.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