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직업
학교 관사 옆 공터가 심심하지 않게
거기에다 호박을 심자 했더니
선생님, 우리가 우리를 어떻게 심나요?
깔깔대더니
어느새 호미와 삽과 괭이가 모이고,
비료가 한줌씩 오고,
쇠똥거름도 한 리어카 달려왔지
사실 이런 일이 생전 처음인 나는
구덩이마다 호박씨 서너 개씩은 꼭꼭 심으며
이것들이 땅속에서 부디 숨결을 열어 주기를
그리하여 이 세상하고 다시 관계를 맺어주기를
얼마나 조마조마 기다렸는지 몰라
떡잎이 삼삼오오 오종종 돋은 날
나는 고것들이 햇볕의 끈을 부디 놓치지 않기를
빌었지, 덩굴손을 가지게 되면
자기 아닌 존재가 이 세상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것을 손 뻗어 툭, 건드려 보는 재미로 살아가기를
수업 없는 빈 시간에 둘러보고 물을 주며
또 빌고는 했지
사는 게 뭐 별거 있겠어.
자꾸 물을 주다 보면
호박꽃은 필거야
그러면 어느 날 아침 한 때
나, 호박꽃 주위에서 붕붕거리는 한 마리 벌이 될지도 몰라
세상 속으로 뚫린 귀가 있다면
두두둥 둥둥둥 두둥두 둥둥두둥
호박이 익어가는 소리도 들을 거야
그래그래, 삶의 뜨거운 날 다 지나간 뒤에
우리 반 여학생들 궁뎅이 같은 놈이나
드문드문 열렸으면 좋겠어.
-안도현, <나의 희망>-
올해 큰 아이가 중학생이 되었고 얼마 전 첫 시험을 봤다. 나는 시험 기간 중 하루 학부모 감독을 맡기로 미리 신청되어 있었다. 나는 3학년 교실에서 감독을 하게 됐는데 보통 학부모 감독은 교실 뒤에 서서 시험 감독 교사를 돕는 역할을 해서 교실을 찬찬히 둘러볼 수 있었다. 환경미화가 끝난 지 얼마 안 된 교실의 한쪽에는 학생들의 ‘꿈’이라는 게시판 위에 학생들의 이름과 각종 직업들이 나란히 쓰여 있었다. 대부분 공무원, 변호사, 운동선수 등의 특별할 것 없는 직업들이었는데 유독‘피부과 의사’가 눈에 띄었다. 중학생이라는, 무슨 일이든지 생각해보라고 하면 만사가 귀찮아지는 연령대의 아이들이 적어낸 직업들 중에 그냥 ‘의사’도 아니고 콕 집어 ‘피부과 의사’라니. 다른 밋밋한 직업들과 비교했을 때 지나치게 구체적이어서 그랬던 것 같다.
물론 특별히 ‘피부과 의사’가 되어야 하는 어떤 개인적인 사연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런데 그러한 사연을 상상하기보다는 단순하게 돈 잘 버는 의사가 되고 싶다는 의미라 생각하기가 더 쉽지 않은가.그리고 정말 그 직업을 선택한 이유가 내가 생각한 그 단순한 이유가 맞다면 그것은 학생 스스로 선택한 결정이라기보다는 부모가 정해주었을 확률이 더 높을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는 어떤 사람을 소개할 때 ‘나이’와 ‘직업’을 중심으로 이야기할 때가 많다. 그중 직업은 그 사람의 능력을 설명할 때 많이 언급하는데 물론 그 ‘능력’이라는 것은 보통 ‘경제력’과 연결된다. 학생의 능력은 성적으로, 사회생활을 하는 사람들의 능력은 연봉이나 집값 등으로 설명하게 되는데 여기에 대한 비판적인 생각 없이 교회에서조차 비슷한 경우를 보게 된다. 모이는 성도의 숫자나 헌금의 액수로 교회의 능력을 평가하고 그것으로 하나님의 축복 순위를 가늠하기도 한다. 요즘에는 교회 건축의 붐이 일어서 얼마짜리 건물을 소유하느냐 역시 교회의 자랑으로 보기도 한다. 당연히 크리스천들은 이런 부분에서 불편함을 느끼고 이와 다른 기준을 붙들고 살아야 하는데, 오히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뻔뻔할 정도로 당당하게 지내고 더 많은 숫자, 더 앞선 숫자를 차지하기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으니 답답할 뿐이다.
그런데 장래 희망을 이야기하거나 어떤 사람을 설명할 때 단순한 직업이 아니라 그 단어 앞에 그 직업을 수식하는 관형절을 가져오면 훨씬 다른 느낌이 된다. 예를 들어 단순히 ‘의사’가 아니라 ‘아픈 사람들을 가족처럼 돌봐줄 수 있는 의사’, 만약 언론사 기자가 되고 싶다면 ‘정의를 바로 세우고 불의에 대항하는 기자’, 요리사라면 ‘맛과 영양으로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주는 요리사’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이렇게 설명한다면 어려서부터 꿈꾸었던 그 직업을 커서 갖지 못했다고 해서 그 꿈이 꺾인 것은 아닐 수 있게 된다. 예를 들어 어떤 학생의 장래 희망이 ‘아픈 사람들을 가족처럼 돌봐줄 수 있는 의사’였는데 이 학생이 결국 ‘의사’가 되지 못했다 하더라도 다른 방법으로 ‘아픈 사람들을 가족처럼 돌보는’ 일을 하고 있다면 그것은 그 꿈을 이뤘다고 볼 수 있다는 말이다.
<나의 희망>은 교사인 화자가 학생들과 학교 관사 옆에 호박을 심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화자는 3연에서 학생들에게 기대하는 바를 ‘자기 아닌 존재가 이 세상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것을 손 뻗어 툭, 건드려 보는 재미로 살아가기를’ 비는 모습으로 설명한다. 다시 말해 ‘타인의 존재를 인정하고 함께 살아가는 삶의 태도를 지니는 사람으로 커 나가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 ‘명문 대학에 진학해서 연봉 높은 직업을 갖는 사람으로 교육하는 것을 바라는' 교사의 모습이 아니다. 그리고 나는 이것이 지금 이 사회에서 요구하는 참된 교사의 모습이라 생각한다.
우리는 온 나라를 슬픔과 분노에 빠뜨린 세월호 사태의 근본 원인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다. 자신이 해야 할 일, 즉 그 직업의 본질을 잊어버리고 자기 목숨, 돈, 사회적 지위 등 비본질적인 것만을 지키려고 했던 사람들이 너무나 많았던 것이다. 그 배 안에 있던 선장과 선원들이 해야 할 일을 했다면, 또 승객들을 구조해야 할 사람들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다면 참사가 벌어졌을까? 내가 현재 가진 직업, 혹은 앞으로 내가 갖고 싶어 준비하고 있는 직업의 본질은 무엇일까? 나는 이 일을 왜 하고 있으며 왜 하고 싶어 하는 걸까? 그 근본을 다시 고민하고 점검해야 할 때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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