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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스31칼럼] 눈으로는 덮을 수 없는 검은 항아리



제목 : 눈으로는 덮을 수 없는 검은 항아리

 

 전 국민을 비탄에 빠지게 한 끔찍한 사건이 일어났다. 승객 4백 여 명을 태우고 인천에서 제주도를 향해 가던 배가 침몰하면서 수백 명의 생명이 한꺼번에 차가운 바다 속으로 사라졌다. 특히 수학여행을 가던 고등학교 학생들의 희생이 너무나 커서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나는 쉽게 글을 이어 나갈 수가 없을 정도로 감정이 격해진다.

얼마 전 김소진의 소설 ‘눈사람 속의 검은 항아리’라는 작품을 학생들과 읽고 수업한 적이 있었다. 이 작품은 어린 소년이었던 주인공 ‘나’가 일련의 사건을 겪으면서 무기력한 어른으로 아프게 성장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다음은 소설의 줄거리다.

 

이 소설의 주인공이자 서술자인 '나'는 재개발 이야기가 한창인 미아리 셋집에 볼일이 있어 들렀다가 그곳에서 살았던 어린 시절의 기억을 떠올린다.

어린 아이였던 ‘나’는 어느 날 아침 일찍 화장실에 가러 나왔다가 실수로 공동 주택 이웃인 욕쟁이 할머니의 귀한 짠지 단지(항아리)를 깨고 만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이 아이가 생각해 낸 최고의 방법은 눈을 감고 주문을 외우는 것이었다. 우랑바리나바롱나르비못다라까따라마까뿌라냐……. 그리고 눈을 떴을 때 항아리가 원상복구된 것은 아니지만 대신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른다. ‘나’는 깨진 항아리 위로 눈을 쌓아 눈사람을 만들어 그 현장을 완벽하게 가린다.

 

어린 아이였던 ‘나’는 예기치 못한 사건을 저지르고 지극히 아이다운 방법으로 그 사건을 무마하려 했다. 눈으로 깨진 항아리를 덮어 버린 것이다. 그러나 눈은 일시적인 방법일 뿐이고 낮에 해가 따뜻하게 내리쬐면 범행 현장은 쉽게 드러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나’는 하루 동안 가출을 감행한다. 개똥 천지인 돌산길을 돌아 나와 눈이 녹아 질척거리는 시장거리, 연탄재가 어지럽게 뒹구는 좁은 골목 등 일부러 더러운 곳만 골라 혼자 떠돈다. (아마도 죄책감으로 얼룩진 마음을 참회하려는, 어린 아이가 선택한 순례의 여정인 듯하다.)

그리곤 어느덧 해질녘...... 욕쟁이 할머니의 걸쭉한 욕설과 엄마의 연탄집게 공격을 걱정하면서도 마음을 단단히 먹고 집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집에 돌아와 보니 눈사람도, 깨진 항아리도 모두 사라져 있었고, 더 놀라운 것은 사람들은 범행을 저지른 ‘나’를 평소와 다름없이 아무렇지도 않게 대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예상치 못한 낯선 모습에 ‘나’는 크게 당황한다. 다음은 ‘나’의 심리가 직접적으로 드러난 본문을 그대로 옮겨온 것이다.

 

나는 나를 둘러싼 세계가 너무도 낯설게 느껴졌다. 내가 짐작하고 또 생각하는 세계하고 실제 세계 사이에는 이렇듯 머나먼 거리가 놓여 있었던 것이다. 그 거리감은 사실 이 세계는 나와는 상관없이 돌아간다는 깨달음, 그러므로 나는 결코 주변으로 둘러싸인 중심이 아니라는 아슴프레한 깨달음에 속한 것이었다.

더 이상 나를 상대하지도 혼내지도 않는 세계가 너무나 괴물스럽고 슬퍼서 싱거운 눈물이라도 흘려야 직성이 풀릴 듯했다. 하긴 눈물 서너 방울쯤 짜내는 것은 일도 아니었으니까. 난 시래기 줄기가 매달린 처마 밑에 서서 몇 방울 떨구며 소리 없이 울었다. 차라리 그 깨진 단지라도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면 혼은 나더라도 나는 혼돈스럽지도 불안해하지도 않았을 것 아닌가.

 

욕쟁이 할머니의 짠지 단지를 깨먹은 사건을 통해 어린 아이였던 ‘나’는 자신을 둘러싼 세계가 자기가 알고 있던 세계와 다른 곳임을 깨닫게 된 것이다. 어린 ‘나’에게 그것은 하루 동안 가출을 감행해야 할 정도로 심각하면서도 어마어마한 사건이었으나 어른들의 세계에서 그 사건은 '어이가 없어 픽 웃음을 지을' 정도의 작은 일일 뿐이었다. ‘나’는 이 두 세계의 차이에서 혼란스러워 하다가 자기가 세계의 중심이 아닌 주변인임을 깨닫게 된다. 이렇게 그는 우울한 현실을 깨달으며 어른으로 성장한다.

 

소설 '눈사람 속의 검은 항아리'는 어른의 삶이란 내가 세상의 중심이 아님을 알게 되는 것이라 말한다. 어른이 된 ‘나’는 어린 시절을 보낸 그 달동네가 재개발된다는 소식에 씁쓸한 마음을 가지면서도 어린 시절의 추억이 가득한 동네를 지켜낼 수 없는 무기력한 주변인임을 다시 한 번 인식하면서 슬퍼한다. 최근 이 작품을 다시 수업하면서 학생들은 이 세상을 어떤 방식으로 아프게 알아갈 지 궁금했다.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이 소설에서 어떤 시험문제가 나올 것인지에만 집중하는 학생들에게, 실은 너희들이 문제 하나 더 맞춘다 해도 이 세상은 너희들이 생각하는 대로 아름답게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려준다는 건 기술적으로도 또 감정적으로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고민만 하다가 작품 설명만으로 건조하게 수업을 마치고 말았다. 어른이 된다는 건 자신이 주인공이 아님을 깨닫는 순간부터 시작된다는 서글픈 현실을 언제 학생들에게 알려야 하는 걸까? 마음이 참 복잡했던 수업이었다.

그런데 세월호 침몰 사건이 터지면서 우리 사회의 잘못된 부분이 한꺼번에 보이기 시작했다. 잘못된 구조 시스템, 책임지지 않는 책임자들, 타인의 비통함을 배경삼아 이미지 메이킹을 하는 정치인들과 무엇보다도 아이들을 버려두고 혼자 도망간 그 어른들을 보면서 나는 몸과 마음을 한꺼번에 앓았다. 그래, 그게 원래 인간의 모습이라고. 인간은 원래 죄인이라고 이렇게 쉽게 넘어가기에는 이 사태가 너무 아프다. (심지어 ‘하나님의 시선으로 이 사건을 바라보자. 하나님의 뜻을 찾자’라고 말하는 크리스천들이 있는데 과연 이것이 우리가 할 말인가? 자식들이 차가운 물속에 잠겨서 죽어가는 동안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부모들 앞에서 이 말이 얼마나 큰 폭력인지 정말 모르고 하는 말인가?)

 

중간고사 준비에 바쁜 학생들아. 이렇게 죽어가는 친구들을 무기력하게 그저 보고만 있는 이 모습이 진짜 어른들의 모습이다. 너희들에게는 공부만 열심히 해서 좋은 대학에만 가면 화려한 세상이 펼쳐질 거라고 이야기하지만 실상은 그렇지가 않다. 어른이 되어도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구나. 이 세상은 깨진 검은 항아리일 뿐이다. 그건 눈으로 가릴 수 없는 현실이야. 주문을 외워도 깨진 항아리는 다시 붙지 않는단다. 어른들의 이기적인 모습이, 책임지지 않은 거짓말들이 너희들의 꿈을, 너희들의 미래를 이렇게 빼앗아 갔구나. 정말 미안하다. 너희들을 위해 우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것이 없어서... 정말 미안해... 

주님..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시고 긍휼을 베풀어 주세요. 주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