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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 사랑, 문학/[광장,청춘], [예스31],[ccmer] 칼럼

[예스31칼럼] 꿈, 지속되어야 하는

삶, 사랑, 문학 

제목 : 꿈, 지속되어야 하는

 

그대 벽 저편에서 중얼댄 말

나는 알아들었다.

발 사이로 보이는 눈발

새벽 무렵이지만

날은 채 밝지 않았다.

시계는 조금씩 가고 있다.

거울 앞에서

그대는 몇 마디 말을 발음해본다

나는 내가 아니다 발음해본다

꿈을 견딘다는 건 힘든 일이다

꿈, 신분증에 채 안 들어가는

삶의 전부, 쌓아도 무너지고

쌓아도 무너지는 모래 위의 아침처럼 거기 있는 꿈

-황동규, <꿈, 견디기 힘든>

 





꿈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자니 마음이 무거워진다. 내가 청년이라 불리던 그 시절, 교회에는 ‘비전’이라는 말이 유행처럼 번졌던 적이 있었다. 너도나도 비전에 대한 이야기를 했고 자신이 어떤 일을 하며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헌신할 것인지를 나눴다. 그런데 십 수 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그 꿈을 이루었나? 아니, 내 꿈은 정확히 무엇이었을까?

 

이 작품의 화자는 거울을 보며 자기 자신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그러나 거울 속의 또 다른 ‘나’는 벽 저편에 있다. 또 다른 ‘나’가 중얼대는 말을 남들이 다 자는 새벽이 되어서야 겨우 알아들었으니 그 전까지는 소통이 불가능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렇게 화자와 또 다른 ‘나’ 사이에 벽이 생긴 이유는 뭘까. 화자는 ‘꿈을 견딘다는 건 힘든 일’이라고 말하고 있다. 거울에 비친 모습을 통해 힘들어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그가 견디면서 지켜내려 했던 꿈은 ‘신분증에도 채 안 들어가는 삶의 전부’였지만 쌓아도 무너지고 또 쌓아도 무너지는 모래 위에 존재한다. 그래서 그 꿈을 견디지 못하는 거울 속의 자신에게 ‘나는 내가 아니다.’ 라고 발음해보는 것이 아닐까. 날이 채 밝지 않은 새벽, 그래도 시계는 조금씩 흘러간다. 언젠가는 꿈과도 같은 아침이 올 것이다. 그러나 그 아침은 무너지는 모래 위에 있다. 인간은 영원히 꿈을 이룰 수 없는 슬픈 존재일 뿐인가.

 

그러나 반대로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인생의 어느 시점에서 우리가 가진 꿈을 완성했다면, 그래서 더 이상 아무것도 쌓아 올릴 필요가 없게 된다면, 과연 그것을 우리 인생의 ‘아침’이라 할 수 있을까? 그러나 무너질 것을 뻔히 알면서도 부질없다 생각하지 않고 그 순간 최선을 다해 쌓아 올리는 사람에게는, 쌓아 올리는 것이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생각해보면 인간이 쌓을 수 있는 것은 결국 모래와 같은 것들뿐이니까.) 다만 무너질 줄 알면서도 끊임없이 쌓아 올리는 그 행위의 지속성, 나는 이 부분에서 우울하게만 보이던 결말에서 숨어 있는 희망을 찾아냈다.

 

어려서부터 내 꿈은 교사였고, 교사가 되었을 때는 내 몸에 잘 맞는 옷을 입은 것 같았다. 때로는 직업병처럼 너무 가르치려 해서 다른 사람들이 싫어하기도 했고, 언제라도 장례식장에 갈 수 있을 것만 같은 옷차림 때문에 ‘교사 스타일’이라며 놀리는 친구들도 있었지만, 아무튼 나는 어렸을 때부터 꿈꿔왔던 직업을 위해 대학에 갔고 그 직업을 가졌고 오랫동안 그 자리에 있었다. 그런데 나는 ‘꿈을 이뤘다.’고 말할 수 없었다. 과연 이룬 것일까? 다시 생각해보면 내 꿈은 단순히 ‘교사가 되는 것’이 아니었던 것 같다. ‘좋은 교사가 되는 것’도 아니었고 ‘학생을 가르치는 것’도 아니었다. 나는 왜 교사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을까? 고등학생 시절, 미안하게도 노력에 비해 성적이 좋은 편이었다. 나는 눈에 띄게 많은 차별을 받았었다. 물론 그 차별은 나에게 이로운 차별이었지만 나는 그것이 불편했다. 선생님들이 나를 특별하게 여긴 만큼 내 친구들과 나를 다르게 대했기 때문이다. 내가 교사가 된다면, 성적이나 집안 환경과는 상관없이 학생들에게 ‘너는 좋은 아이야’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그리고 어른이 되면 이것을 잊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랬던 나를 싹 잊어버리고 단순히 ‘직업’이라는 것에만 초점을 맞춰 그것을 간절히 바랐던 것이다. 나는 다 쌓아 올렸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모래였고 너무나 쉽게 무너졌다. 교사로서 나는 일도 잘 했고 수업도 나쁘지 않았지만 내 꿈을 성취했다고 생각할 수 없었다. 오히려 그것을 진짜 ‘나’로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꼭 교사라는 직업을 가져야만 ‘너는 좋은 사람이야’라고 말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사람들을 평등하게 대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신분증’ 따위에 담아낼 수 없는 꿈이고 내가 살아가는 내내 쌓아 올려야만 하는 것이었다. 결국 내가 가지려 했던 신분증은 쉽게 무너지는 모래와도 같은 것이었다. 그것보다 무너질 것임을 뻔히 알면서도 다시 쌓으려는 그 행위를 멈추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함을 깨닫게 되었다. 어쩌면 그래서 미련 없이 교단을 떠날 수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인생의 끝을 알고 있다. 우리가 붙들고자 하는 신분증이 무엇이든지 그것이 내 삶을 만족스럽게 채워주지 못할 것이며, 인간의 힘과 노력으로는 우리가 가진 꿈을 완벽하게 완성시킬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실패한 인생일까? 내 꿈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확실하다면, 억지로 신분증에 끼워 맞추려 하기보다는 무너질 줄 알면서도 쌓는 행위를 멈추지 않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결국에는 하나님이 쌓아주실 것이며 우리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손길에 작은 손길 하나 얹을 수 있는 은혜를 누리면 되는 것이다. ‘쌓아도 무너지고 쌓아도 무너지는’ 행위는 ‘무너지면 쌓고 무너지면 쌓는’ 행위의 반복과 같은 의미일 테니까. 

명사로서의 ‘꿈’보다는 동사로서 ‘꿈을 꾸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렇다고 아무거나 닥치는대로 꿈꾸라는 게 아니라 꿈은 ‘완성’이 아니라 ‘과정’이라는 말이다. 꿈은 끝이 있는 것이 아니고 삶 전체에서 지속되어야 하는 것이다. '무엇이 되는 것'으로 꿈의 끝을 보려 하기보다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지를 고민하고, 실패처럼 보여도 포기하지 않는 것이 진짜 우리가 가져야 할 꿈의 자세가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