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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 사랑, 문학/[광장,청춘], [예스31],[ccmer] 칼럼

[예스31칼럼] 임천한흥(林泉閑興)

제목 : 임천 한흥(林泉閑興)


보리밥 풋나물을 알맞게 먹은 후에
바위 끝 물가에 실컷 노니노라
그 남은 여남은 일이야 부러울 줄이 있으랴

누고셔 삼공(三公)보다 낫다 하더니 만승(萬乘)이 이만하랴
이제로 헤어든 소부 허유(巢父許由)가 약았더라
아마도 임천 한흥(林泉閑興)을 비길 곳이 없어라
 
내 성이 게으르더니 하늘이 알으실사
인간 만사(人間萬事)를 한 일도 아니 맡겨
다만당 다툴 이 없는 강산(江山)을 지키라 하시도다
 
-윤선도, <만흥(漫興)> 중에서

  윤선도는 1차 예송논쟁 당시 남인을 대표하여 서인의 송시열과 끊임없이 싸워야만 했고 결국 오랜 세월을 유배지에서 보내게 된다. <만흥>은 지긋지긋한 경쟁과 정치 싸움에서 벗어나 자연에 귀의해서 살면서 자연 속에서의 한가로움을 즐기는 삶에 대해 노래한 것이다. 보리밥에 풋나물을 알맞게 먹고 물가에서 실컷 놀다 보니 속세에서 출세하여 성공한 삶을 사는 것이 부럽지 않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생긴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허유와 소부는 중국 요임금 때의 인물이다. 요임금이 왕위를 물려줄 인재를 찾다가 기산에 산다는 허유의 이야기를 듣고 찾아간다. 그러나 허유는 못 들을 말을 들어 귀가 더러워졌다며 영수라는 강에서 귀를 씻었고, 마침 그 때 소에게 물을 먹이려고 강가로 오던 소부는 이 모습을 보고 ‘더러운 물을 내 소에게 먹일 수 없다’며 소를 끌고 상류로 올라갔다는 이야기는 다들 한 번씩은 들어봤을 것이다. 이처럼 소부와 허유는 윤선도와 같이 속세를 떠나 자연에서 유유자적하며 살아가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들이었다. 그런데 윤선도는 왜 소부 허유에게 ‘약았다’는 단어를 사용했을까?

  ‘삼공’은 영의정, 우의정, 좌의정을 말하는 것인데 누군가가 속세를 떠나 자연에서 사는 것이 삼정승으로 사는 것보다 더 낫다고 했던 모양이다. 그런데 막상 속세를 떠나 살아보니 삼공의 삶은 비교 대상조차 아니었던 것이다. ‘만승’은 만 대의 수레라는 뜻인데 만 대의 수레를 끌 수 있는 존재는 오직 천자(중국의 황제)밖에 없었다. 현실적으로 삼정승은 가능성이 있는 위치지만 천자는 감히 우러러볼 수도 없는 지위다. 그런데도 천자로 살기보다  자연에서의 한가로움을 즐기며 사는 것(임천한흥)이 훨씬 좋은 것임을 경험으로 깨닫게 된 것이다. 그러니  허유가 요임금이 제안한 왕위를 거절한 것은 윤선도의 생각으로는 안분지족을 실천하기 위함이 아니라 자연을 즐기며 사는 것이 훨씬 질 좋은 삶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에 더 나은 것을 선택한 것뿐이라 생각했고 그래서 소부 허유에게 약았다는 표현을 사용한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라 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세상의 흐름을 쫓아가기 위해 애쓰는 것을 볼 때가 많다. 하나님을 이용해서 성공의 욕망을 채우려는 모습이다. 특히 그러지 않을 것 같은 사람들 중에서 자녀 교육 문제에서만큼은 이상하리만큼의 욕심을 가지고 있는 것을 많이 본다. 본인은 자기보다 더 한 사람들이 많으니 그 정도는 욕심도 아니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내가 볼 때는 다 똑같아 보인다. 학부모들의 조급한 마음이 전혀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지만, 결국 우리나라의 교육 시스템 자체가 불합리하다 못해 불의하기까지 하고 그것이 결코 학생들의 교육을 위해 고안된 체계도 아니며 주먹구구식 결정으로 이루어진 것인데, 아무리 이렇게 설명을 해도 듣지 않고 그 레이스에서 뒤쳐지면 큰일 난다며 아이들을 강제로 자기 페이스를 훌쩍 뛰어 넘도록 달리기를 시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자녀들에게 성경 말씀을 외우게 시키는 것도 혹시 이거 열심히 하면 하나님이 기특하게 여겨서 똑똑한 머리를 보상으로 주지 않을까 기대하는 심리나 하나님 잘 믿어서 록펠러처럼 돈 많이 벌고 링컨처럼 거대한 권력을 쥐게 된 사람들의 위인전을 읽히는 마음을 가지고서는 결코 제대로 된 양육을 할 수는 없다. 
  우리 아이들이 왕따 당할까봐 걱정하기 이전에 왕따 당하는 친구들을 보호해줄 수 있는 용기를 갖기를, 남들 위에 우뚝 서는 리더십을 갖추기를 바라기 이전에 마음이 힘든 친구들과  공감하는 능력을 갖추기를, 성공과 출세의 길을 추구하지 않더라도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삶을 살기를 기도한다. 그것이 세상적인 출세나 성공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걸 잘 알고  있다. 어쩌다가 남들보다 더 잘날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 못할 확률이 더 크다. 하지만 세상의 관점이 아니라 전혀 다른 각도에서 봤을 때는 유의미한 질서 안에 포함되어 있을 거라 생각한다. 어떤 이들에게는 남들처럼 쌓아둔 재산도 없고 사회적 지위도 그리 좋지 못한 사람이 하는 자기변명으로 보일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보리밥 풋나물을 먹으면서 생기는 여유, 다투지 않고 경쟁하지 않아도 가질 수 있는 행복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 아이들이 꼭 알았으면 한다. 다만 그것이 회피가 아니라 스스로 선택한 길이어야 하며 그 안에서 진짜 질서를 찾아 따르는 능력과 용기가 있는 아이들이 되기를 더더욱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