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 사랑, 문학
제목 : 새해 다짐
겨울 나무와
바람
머리 채 긴 바람들은 투명한 빨래처럼
진종일 가지 끝에 걸려
나무도 바람도
혼자가 아닌 게 된다.
혼자는 아니다
누구도 혼자는 아니다
나도 아니다.
실상 하늘 아래 외톨이로 서 보는 날도
하늘만은 함께 있어 주지 않던가.
삶은 언제나
은총(恩寵)의 돌층계의 어디쯤이다.
사랑도 매양
섭리(攝理)의 자갈밭의 어디쯤이다.
이적진 말로써 풀던 마음
말없이 삭이고
얼마 더 너그러워져서 이 생명을 살자.
황송한 축연이라 알고
한 세상을 누리자.
새해의 눈시울이
순수의 얼음꽃,
승천한 눈물들이 다시 땅 위에 떨구이는
백설을 담고 온다.
-김남조, 「설일(雪日)」
2013년을 마무리하며 한 해를 어떻게 지냈는지 알고 싶어서 1년 간 예스삼일에 기고한 글들을 찾아 읽어 보았다. 마음에 무거운 돌덩이를 품고 살아온 것처럼 내내 힘든 한 해였던 것이 글 안에 고스란히 표현되어 있었다. 이 글의 꼭지는 ‘삶, 사랑, 문학’이다. 처음 예스삼일에 글을 실었을 때는 정말 사랑하는 마음으로 글을 썼다. 교회 안에서 의외로 눌리고 힘든 사람들을 많이 만나게 되었고 (물론 나도 과거에는 그 중 한 명이었다.) 하나님의 자녀로 모든 억눌린 것에서 해방되어야 하는데 왜 아직도 이렇게 힘들게 살아야 하나 하는 생각에 그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고자 하는 마음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다짜고짜 위로한다고 하면 읽는 사람들이 ‘네가 뭔데?’ 할 것만 같아서 권위 있는 글을 인용해야겠다는 생각을 했고 성경에 관련된 글들은 다른 사람들도 많이 쓰고 내가 그 정도의 수준도 아니니까 나는 내가 잘 알고 있는 문학 작품을 인용하면 더 깊이 있는 글이 될 것 같아서 지금과 같은 형식으로 글을 쓰게 된 것이다.
그런데 지난 한 해 동안 기고했던 글에서 ‘사랑’이 슬쩍 빠진 것 같다. 타인을 위로하고 용기를 주는 글을 쓰고 싶었으나 오히려 분풀이를 하듯이 쓴 글들이 더 많았다. 그만큼 이놈의 세상이 내 마음에 자꾸만 분을 쌓아 올리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고 내가 그런 상황을 성숙하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겠다. 차라리 ‘삶, 사랑, 문학’이 아니라 ‘문학과 불평불만’ 혹은 ‘문학과 잔소리’ 이런 식으로 이름을 바꿔야 하나 잠깐 고민했었지만 그래도 내 마음을 잘 다스려 정말 사랑이 넘치는 글을 쓰겠다고 다짐하면서 꼭지는 그대로 두기로 했다.
새해가 되면서 내가 다짐하는 것은, 아무리 내 마음에 분이 쌓여도 그것을 독자들에게 분풀이하듯이 쏟아내지 않겠다는 것이다. (많지는 않아도 읽어주는 분들이 계시니까... ) 어둡고 낮은 곳에서 자발적으로 살면서 더 낮은 곳으로 더 어두운 곳으로 흘러가기를 소망하는 분들도 계실 텐데 내가 뭐라고 이렇게 발길질만 하려 했는지... 더 깊은 독서와 묵상으로 읽는 이에게 작은 위로와 힘이 되는 글을 이어 가고 싶다.
<설일>이라는 제목은 ‘눈 오는 날’이라는 의미와 함께 ‘설날’이라는 의미도 함께 가지고 있다. 그래서 새해 첫 글에 소개하고 싶었다. 이 작품에 표현되는 절대자는 권위를 가지고 모습으로 인간의 구원의 문제를 비장하게 다루는 모습이 아니다. 외롭고 힘들다고 느껴질 때나 좌절과 절망에 빠진 순간에 내가 미처 깨닫기도 전에 이미 나와 함께 하시는 분이다. 하나님이 항상 함께 하고 있음을 알게 되자 비로소 ‘삶은 언제나 / 은총의 돌층계의 어디쯤이다. / 사랑도 매양 / 섭리의 자갈밭의 어디쯤이다’ 라는 것을 깨닫는다. 은총은 돌층계이고 섭리는 자갈밭이다. 그리고 우리의 삶은 그 높고 높은 돌층계 중간의 어디쯤이고 사랑 역시 거칠고 거친 자갈밭 중간의 어디쯤에 자리한다. 그러나 삶과 사랑이 그렇게 힘들다는 것을 아는 순간, 화자는 오히려 말로 풀어대던 불평불만을 안으로 삭이고 좀더 너그럽게 세상을 바라보게 된다. 아니, 오히려 ‘황송한 축연’이라 생각하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한 세상을 누리려고 한다.
2014년 내게 필요한 것은 ‘얼마 더 너그러워진’ 삶의 태도일 것이다. 그리고 그 너그러움이 나 자신을 향한 것이 아니라 겨울 바람 쌩쌩 부는 이 추운 겨울에 함께 어깨 부딪히며 살아가야 할 당신을 위한 것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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