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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 사랑, 문학/[광장,청춘], [예스31],[ccmer] 칼럼

[예스31 칼럼] 승화

삶, 사랑, 문학 - 제목 : 승화


더러는
옥토(沃土)에 떨어지는 작은 생명이고저…….

흠도 티도, 
금가지 않은
나의 전체는 오직 이뿐!

더욱 값진 것으로 
드리라 하올 제,

나의 가장 나아종 지니인 것도 오직 이뿐!

아름다운 나무의 꽃이 시듦을 보시고
열매를 맺게 하신 당신은

나의 웃음을 만드신 후에 
새로이 나의 눈물을 지어 주시다.
-김현승, 눈물-

김현승의 ’눈물‘은 사랑하는 어린 아들을 잃고 그 슬픔을 기독교 신앙으로 승화시켜 쓴 작품이다. 인간이 지닌 가장 순수하고도 근원적인 것이 눈물이라고 시인은 말한다.
 
학생들과 수업을 하다 보면 문제집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작품 중 하나가 바로 김현승의 ‘눈물’입니다. 그리고 이 작품의 해설에 빠지지 않고 나오는 단어가 바로 ‘승화’이고요. 승화는 원래 ‘어떤 현상이 한 단계 더 높은 영역으로 발전함'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과학에서는 고체가 액체의 단계를 거치지 않고 바로 기체가 되거나 기체가 바로 고체가 되는 것을 의미하고, 심리학에서는 사회적으로 인정되지 않는 충동이나 욕구를 예술 활동, 종교 활동 등 사회적, 정신적 가치가 있는 것으로 치환하여 충족시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워낙 유명한 작품이니 다들 한 번은 읽은 경험이 있을 겁니다. 솔직히 예전에 이 시를 읽을 때는 머리로 이해는 했지만 그것으로 끝이었습니다. 그러나 아이를 낳고 엄마가 되고 나니 시인의 아픈 마음에 작게나마 공감할 수 있었습니다. 자녀를 잃은 슬픔을 담아낸 작품들은 꽤 많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작품들은 입에 발린 말로 값싸게 꾸며낸 것이 아니라 그 찢어지는 아픔으로 이루어진 통한의 고백이 진솔하게 담겨 있습니다. 실제로 저는 큰 아이를 낳은 후 학교에서 정지용의 ‘유리창’이라는 시를 가르치다가 ‘고운 폐혈관이 찢어진 채로 / 아아 너는 산새처럼 날아갔구나.’의 구절을 읽으며 울컥 눈물이 쏟아진 적도 있었으니까요. 단순히 지식으로 담고 있던 작품에 대한 이해가 엄마가 된 이후에는 마음으로 느낄 수 있게 된 것이지요.

그러나 이 ‘눈물’이라는 작품이 더욱 특별한 것은 다른 작품들과 달리 그 슬픔의 밑바닥에서 결국은 하나님의 섭리를 발견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눈물’은 자신의 삶에서 순간적이고 일시적인 것을 걷어낸 후 남아 있는 것은 모든 생명의 근원이며 가장 순수하고 값진 것이며 영원히 간직해야 할 될 것이었습니다. 아름다운 나무의 ‘꽃’은 바로 시들지만 그 꽃이 시듦으로 열린 ‘열매’에는 생명이 깃들어 있듯이 일시적인 ‘웃음’ 뒤에 찾아온 ‘눈물’은 인생의 모든 진리를 깨닫게 합니다.
‘승화’란 앞에서도 말했듯이 ‘어떤 현상이 한 단계 더 높은 영역으로 발전함’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저는 이 단어야말로 믿는 자들의 삶의 태도를 한 마디로 정리할 수 있는 단어라고 생각합니다. 1단계에서 2단계로 자연스럽게 넘어가는 것은 승화라 할 수 없겠지요. 성공해서 감사하고 출세해서 감사하고 울 아이 건강하고 공부 잘 해서 감사한 것이 그런 부류일 듯합니다. 승화는 1단계에서 바로 4-5단계로 뛰어 넘는 것입니다. 중간 과정이 생략되니 input과 output만 보게 되면 뜬금없고 비논리적인 듯이 보이기도 합니다. 자식을 먼저 떠나 보낸 아비가 그 아픔으로 흘린 눈물을 '열매'로 표현하는 것이 쉽게 이해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죄 많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독생자 아들을 보내신 사랑도 역시 input과 output이 도저히 연결될 수 없는 강력한 사랑의 표현이 아니겠습니까. 승화란 이럴 때 쓰는 말일 듯합니다.

  저도 이제 나이가 이러하다보니 또래들끼리 모여서 이야기하다 보면 대부분 자녀 교육에 대한 대화가 많아질 수밖에 없더군요. 아이 성적 이야기, 학원 이야기, 학교 선생님 이야기, 우리 아이 괴롭히는 친구들과 그 엄마들 이야기가 끝이 없습니다. 동조하고 공감하는 편이지만 매번 똑같은 이야기를 돌려 듣게 되면 솔직히 지루합니다. 저는 남들처럼 모성애가 강하지 않는지 아이들 이야기보다 제 관심 분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데 대부분의 엄마들은 책을 봐도 자녀를 위한 책을 보고 심지어 학창 시절 그렇게도 싫어하던 영어, 수학 공부를 자녀를 가르치기 위해 EBS 인강까지 찾아가며 공부까지 하는 엄마들이 있으니 재밌는 대화가 이어질 리가 없지요. 다들 대단한 엄마 에너자이저들입니다.
  이상하게도 교회 안의 모임이나 교회 밖의 모임이나 자녀를 향한 부모의 마음은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이미 창세 전부터 자녀의 삶을 붙들고 계신 하나님의 주권을 왜 부모들은 인정하지 않으려 하는지요. 하나님은 이미 우리 자녀들을 향한 독립적이면서도 독특한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것은 아이의 성품이나 기질로도 드러날 수 있고, 그들이 자라면서 만나는 사람이나 환경으로도 드러날 수 있겠지요. 이 모든 것을 무시한 채 세상적인 기준으로 불안해 하면서 부모의 뜻대로 아이들을 휘두르고 그것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하는 것이 과연 옳은 모습일까요.

제가 오늘 하고 싶은 말은 이것입니다. 자녀를 사랑하는 그 에너지를 개인적 차원으로 끝내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차원으로 승화해보자는 겁니다. 오로지 자녀만을 바라보고 그 하나에 매달려 하루를 보내는 사람들. 자녀들의 성적표에 울고 웃는 사람들. 그 에너지의 방향을 좀 틀어보면 어떨까요. 우리 아이만 바라보는 게 아니라 우리 아이가 걸어갈 길을 아이와 함께 바라보는 거죠. 어른으로서 아이들에 비해 먼저 그 길을 걸어가고 있는 사람들이 굳이 아이들이 있는 곳으로 되돌아서서 아이들을 옥죄며 사소한 일에 일희일비하지 말고요. 먼저 그 길을 걷는 인생의 선배로서 길을 정비하기도 하고 잘못된 방향으로 난 길을 바른 방향으로 새로 뚫기도 하면서 우리 자녀들이 바른 목적지를 향해 갈 수 있도록 이끌어야 하는 게 부모가 해야 할 일이 아닐까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걸어가야 할 그 길에 대해 잘 알아야 할 것입니다. 목표도 과정도 잘 알고 있어야 나도 우리 자녀들도 온전히 원하는 목적지에 이르게 되겠지요. 목표는 바로 하나님에 있을테고 길의 방향 역시 하나님의 말씀으로 정해질 것입니다. 그런데 걸어가야 하는 그 길은 어떻습니까? 우리가 살아가는 이 현실, 바로 이 사회를 통과해야 그 목표에 이르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제가 당부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집안에 자녀 교육을 위해 텔레비전 없앤 가정 많으시죠. 그런데 왜 신문도 안 보는 건가요? 내가 살고 있고 우리 자녀가 살아가야 할 이 사회에 대해 그렇게 아무것도 모른 채 살아도 마음이 편안한가요. 그리고 다양한 직, 간접 경험을 하면 좋겠습니다. 가끔 읽는 책을 보면 자녀 양육, 좋은 엄마 되기 혹은 유명한 사람 엄마들이 쓴 간증들 뭐 이런 종류만 읽는데 그래봐야 그 책 통해서 좋은 엄마가 될 수는 없습니다. 솔직히 우리 아이 잘 살게 해주고 싶은, 또 그렇게 사는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마음 이용해서 돈 벌려고 출판하는 책들도 있으니까요. 책뿐만이 아니라 다양한 사회적 실천을 통해 엄마로서의 내가 아니라 사회인으로서의 나를 좀 단련시켜 봅시다. 모르니까 겁이 나고 겁이 나니 외면하고 싶어지는 겁니다. 교회 안에 숨어 움츠리고 사는 어른들이 오히려 아이들은 세속적으로 출세하고 안정적으로 살기를 바라는 이 이중적인 태도들은 이제 우리 안에서는 털어내야 하지 않을까요? 그 에너지들 제대로 모여 승화된다면 해답이 없어 보이는 답답하고 어두운 현실도 밝고 건강한 사회로 변화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