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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 그리고 잔소리

곽재구 <절망을 위하여>

곽재구, 「절망을 위하여」

바람은 자도 마음은 자지 않는다
철들어 사랑이며 추억이 무엇인지 알기 전에
싸움은 동산 위의 뜨거운 해처럼 우리들의 속살 을 태우고
마음의 배고픔이 출렁이는 강기슭에 앉아
종이배를 띄우며 우리들은 절망의 노래를 불렀다
정이 들어 이제는 한 발짝도 떠날 수 없는 이 땅에서
우리들은 우리들의 머리 위를 짓밟고 간
많고 많은 이방의 발짝 소리를 들었다
아무도 이웃에게 눈인사를 하지 않았고
누구도 이웃을 위하여 마음을 불태우지 않았다
어둠이 내린 거리에서 두려움에 떠는
눈짓으로 술집을 떠나는 사내들과
두부 몇 모를 사고 몇 번씩 뒤돌아보며
골목을 들어서는 계집들의 모습이
이제는 우리들의 낯선 슬픔이 되지 않았다
사랑은 가고 누구도 거슬러 오르지 않는
절망의 강기슭에 배를 띄우며
우리들은 이 땅의 어둠 위에 닻을 내린
많고 많은 풀포기와 별빛이고자 했다


2012년 12월 대선, 그 절망의 끝에 이 시를 떠올리고 짧은 글을 쓴 적이 있었다.

http://tomorrow5.tistory.com/46


곽재구는 광주 출신으로 1980년대를 관통하며 작품활동을 했다. 


광주에서 민간인 학살로 시작한 80년대 군부독재시절, 그 공포의 순간을 시인은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아무도 이웃에게 눈인사를 하지 않았고
누구도 이웃을 위하여 마음을 불태우지 않았다
어둠이 내린 거리에서 두려움에 떠는
눈짓으로 술집을 떠나는 사내들과
두부 몇 모를 사고 몇 번씩 뒤돌아보며
골목을 들어서는 계집들의 모습이
이제는 우리들의 낯선 슬픔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 2012년 12월, 박근혜 대통령 당선자를 보면서 나는 또 이런 시대가 다시 시작된다는 생각에 무척 괴로웠다.


비정상적인 상황이 낯설지 않게, 익숙한 느낌으로 다가오는 대한민국
그 비극은 단발적이지 않고 지속적이며 꾸준히 우리 삶을 파고 들고 있다....


한 학부모의 인터뷰 내용이 마음에 와 박힌다.

"제가 30대 때 삼풍백화점이 무너졌어요. 사연 들으면서 많이 울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그 뒤로 제가 한 일이 없는 거에요. 

10년마다 사고가 나는 나라에서 제도를 바꾸려고 아무 노력도 하지 않아서 

제가 똑같은 일을 겪었어요. 

지금 SNS하면서 울고만 있는 젊은 사람들, 

10년 뒤에 부모 되면 저처럼 돼요. 

봉사하든 데모하든 뭐든 해야 돼요".
http://www.nocutnews.co.kr/news/4012274


이 절망의 강기슭에서
함께 배를 띄우자....
이 땅의 어둠 위에서 탈출할 수 있는
그 풀포기와 별빛이 되자....




김혜옥_종이배 띄우고_캔버스에 유채_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