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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 사랑, 문학/[광장,청춘], [예스31],[ccmer] 칼럼

[예스31칼럼] '함께', 그리고 '서로'

[삶, 사랑 문학] '함께', 그리고 '서로'
 
물 먹는 소 목덜미에
할머니 손이 얹혀졌다.
이 하루도
함께 지났다고,
서로 발잔등이 부었다고,
서로 적막하다고,
-김종삼 '묵화'-
 
   오랜만에 다시 예스31을 통해 인사드리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바쁘게 살았다는 핑계로 생각하기를 게을리 하여 글을 쓸만한 에너지를 충전하지 못하고 지내 왔었네요. 그러다가 생활 패턴이 바뀌는 일이 있어 한동안 멈췄던 글을 다시 쓰기로 마음먹게 되었답니다.  작년 가을 계약이 만료되면서 15년 이상 해오던 기간제교사 생활을 자연스럽게 접게 되었고, 고민 끝에 학교로 돌아가는 대신 개인교습신고를 하고 집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로 결정하게 된 것입니다. 덕분에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졌고 제 스스로가 나태해지지 않도록 평소 마음 먹었던 몇 가지 결심들을 실천하게 되었는데 그중 하나가 유기견들을 입양한 것입니다.
 
   평소 유기견 보호에 관심이 많았던 저는 몇 년 전부터 유기견 보호 관련 카페에 가입하여 미비하게나마 온라인상으로 활동하고 있었는데, 이 카페를 통해 드디어 작년 9월 두 마리의 강아지를 입양할 수 있었습니다. 입양한 주원이와 뽀뽀는 모두 믹스견으로 주원이는 유기된 지 1년, 뽀뽀는 2년 이상 지났지만 입양희망자가 나타나지 않아 위탁소에서 오랫동안 입양을 기다리던 사연이 많은 강아지들입니다. 사람을 잘 따르는 착한 강아지들인데 단지 몸집이 좀 크고 이름 있는 품종이 아니라는 이유로 사람들로부터 외면받아 온 것이죠. 그리고 올 1월에는 입양될 때까지 가정에서 책임을 지는 ‘임시보호’를 신청하여 이제는 땡글이도 가족으로 합류, 현재 우리집은 사람 4명과 강아지 3마리, 햄스터 1마리가 정신없이 함께 살고 있습니다.
 
   앞으로 제가 연재할 글에는 이 세 녀석이 자주 등장하게 될 것 같습니다. 반려견들과 함께 하는 생활을 통해 크고 작은 깨달음을 얻고 있거든요. 하나님의 피조물에 대한 인간의 태도, 즉 생명존중에 대한 문제나 제가 늘 고민해오던 닫힌 소통의 문제 등과 관련하여 실제적 경험으로 조금씩 배워가는 느낌입니다. 
 
   사람들 사이에 막혀있는 소통의 문제를 사람도 아닌 강아지로 풀어가려는 것이 억지스러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국어라는 교과를 가르치는 직업을 가졌기 때문에 ‘소통’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해 왔습니다. 국어 교과의 목표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사회적 소통'입니다. 언어가 없는 인간, 언어가 없는 사회를 상상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언어’는 소통의 가장 훌륭한 도구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또 반대로 ‘언어’라는 훌륭한 소통의 도구가 있는데도 정말 말이 통하지 않는 답답한 삶을 살고 있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들의 말이나 글은 받아들이기도 힘들 뿐더러 심지어는 4차원의 화법으로 전혀 그 의도를 파악하기 어려운 경우도 겪게 됩니다. 언어만으로 완벽한 소통이 불가능하다면, 그럼 진정한 소통을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 건가요.
 
   이 고민을 해결하는 열쇠를 김종삼의 ‘묵화’라는 작품 안에서 찾아보고자 합니다. 언어라는 소통의 도구 없이 그저 손 하나 얹었을 뿐인데 그 마음을 주고받는 할머니와 소의 모습에서 말입니다. 이 짧은 시에서 유독 눈에 띄는 비슷한 의미의 단어들이 있습니다. 바로 ‘함께’, ‘서로’라는 말입니다. 할머니와 소는 오랜 시간 ‘함께’ 하면서 견뎌온 외로움의 시간들을 따뜻한 손길을 통해  ‘서로’ 위로해주고 있고, 이 아름다운 소통의 모습은 간단한 몇 마디의 말로 그려졌지만 오히려 '묵화'라는 제목과 연결되는 넓고 깊은 여백 안에서 잔잔한 울림을 만들고 있습니다.  
 
   보통 이러한 비언어적 행동은 언어를 보조해주는 역할 정도로만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비언어적 행동이 언어를 매개로 한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이야기를 해주기도 합니다. 특히 '함께'나 '서로'라는 단어로 연결된 관계인 경우 더욱 그렇습니다. 마치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단지 말에서 그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어 우리와 '함께' 하도록 하셨고 십자가에 매달린 '행동'을 통해 이루어진 것처럼 말입니다. 이 아름답고 깊은 사랑을 어찌 인간의 몇 마디 언어로 표현할 수 있을까요.
 
   결국 우리가 가지고 있는 닫힌 소통의 현상은 '언어'라는 도구의 불완전함 때문만은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그의 피조물인 우리와 '함께' 하시는 그 마음을 본받아 우리도 다른 피조물과 소통하도록 노력해야 하며 바로 그 때 '함께' 하고 '서로' 통하는 마음이 있다면 오히려 어설픈 언어적 표현보다 더 큰 의미을 주고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대상이 인간이 아닌 존재들인 경우에도 마찬가지일 테고요.
 
   앞으로 주변의 생명을 가진 모든 존재들에 대해 애정과 관심을 가지고 함께 소통하는 분들이 점차 많아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반려동물들과 함께 사는 이야기를 조금씩 풀어갈 예정입니다. 특별히 주원이, 뽀뽀 그리고 땡글이와 같이 사랑받기 충분한 유기견들의 이야기에 살짝 귀기울여 주신다면 더욱 기쁜 마음으로 글을 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럼 구체적인 이야기로 다음에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6월 17일 예스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