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둔 바다 같구나 말없이
고여 썩어가는 저 검은 바다 밑 같구나
유리창 밖에는 늘 익숙한 어둠,
꽃 피는 봄과 찬란한 여름
저리도 넉넉한 우리나라 가을 또한
어둠 깊숙이 묻어두고
기약도 그리운 마음도 없이
지금 우리는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가?
저마다 ? 표로 가득 찬 머리를 숙이고
밑도 끝도 없이 작은 거부의 몸짓도 없이
우리들은 가라앉고 있구나
늪 같구나 우리가 딛고 사는 이 시대가
스스로 갇혀 가라앉는 늪 같구나
일어서야 하는데 뛰어가야 하는데
잠든 너희들을 흔들어 깨워
저 바다 건너 그리운 마을에 등불 꺼지기 전에
함께 가 닿아야 하는데
유리창 밖에는 어느새 겨울바람이 일고
빈 나무들이며 겨울 산이 온몸으로 우는 소리
늦기 전에 더 늦기 전에
열다섯 어린 영혼들을 불러 깨워야 하는데
나는 무엇인가?
헐떡이며 넘어가는 시간에 몸을 기대고
말없이 흘러가는 나는 누구인가?
아아, 나는 누구인가?
-정일근 <바다가 보이는 교실3-야간 자율학습을 하며>-
최근 짧은 기간 집 근처의 남자 중학교에서 시간 강사를 하고 있다. 건너건너 아는 선생님을 통해 병가를 내신 분을 대신하여 수업을 하게 되었다. 십여 년 전을 마지막으로 이후 내내 고등학생들만 상대해서 그랬는지 중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수업이 나에게 너무나 힘이 들었다. 우선 이 학생들에게는 말이 통하지 않았다. 더구나 남자 중학교이기 때문에 타인과 대화를 어떻게 해나가야 하는지 모르는 아이들이 대부분이었다. 내가 한 마디 하면 학생들도 덩달아 한 마디씩 뱉어 낸다. 나의 한 마디에 학생들의 40마디가 더해지는 것이다. 전달 사항을 말하는 도중에 아이들은 내 말을 잘라먹고 자기들끼리 큰 소리로 대화를 시작한다. 심지어 자리를 이탈해서 교실 안을 마음대로 돌아다니는 학생들까지 있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나는 평소 나의 신념과는 다르게 학생들을 훈육하고 큰 소리로 혼을 내기 시작했다. 수업 시간에 소리를 지르고 몽둥이를 드는 것은 교사로서 학생들에게 이미 지고 들어가는 것으로 생각했었는데 어쩔 수 없었다. (학생들을 직접 때리지는 않지만 위협을 하는 용도로 사용한다.) 매 시간마다 가장 소란스럽게 수업을 방해한 학생 한 명씩을 교무실에 데려와서 꾸중을 한다. 교실에서 혼을 내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었다. 교실은 학생의 편이지만 교무실은 교사의 편이기 때문이다. 교무실에 데려오면 일단 학생의 태도는 누그러지지만 나에 대한 불만은 더 커졌을 것이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이 아이들은 자신의 감정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감정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살고 있는 대한민국의 중학교 2학년들이었던 것이다. 이 남학생들은 자신의 모든 감정을 부정적인 욕설 몇 마디로 다 풀어낸다. 자신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지 않고 단편적인 고민만을 하기 때문에 순간적인 재미를 위해 쉽게 타인을 비방하고 조롱하면서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다. 이런 행위가 스스로의 마음에 상처를 주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 채.
중학생 때는 그 어느 때보다 또래집단이 주는 영향력이 가장 크게 작용하는 때이다. 친구들과 함께 있을 때는 본인이 원하는 것보다 친구들이 원하는 걸 보여주고 싶어 한다.규율을 지키고 어른들의 말에 순종하는 것보다 그것을 어기고 적대시하는 모습을 하면 친구들 사이에서 인정받게 된다. 청소년기의 모습에 거쳐야 할 단계라는 것을 감안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단지 성장 과정의 하나로만 읽어 나가기에 지금의 교실 상황은 그 정도가 지나치다.
이 아이들은 자신을 돌아보는 법을 배운 적이 없다. 자신의 감정이 무엇인지 생각해볼 시간이 없었던 것이다. 음악을 느끼기 전에 피아노학원에 다니며 손가락 훈련을 받았고 시각의 아름다움을 느끼기 전에 미술학원에 다니며 사람 그리는 법을 배운다. 몸을 움직이며 뛰어 노는 즐거움을 배우기 전에 축구교실, 태권도장에 다닌다. 그러다가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 느닷없이 이 모든 학원을 다 끊고 영어나 수학 중심의 교과에 관련된 학원에 집중하게 되면서 어른들에게 경쟁의 세계에서 반드시 이겨야 함을 강요받게 된다. 그런데 막상 중학교 교실을 보게 되면 (특히 남학생의 경우는) 성적이 우수한 아이보다는 덩치가 크고 힘이 센 아이들이 주도권을 갖게 된다. 물론 그 와중에 성적이 우수한 아이들도 나름의 권력을 차지한다. 친구들과 함께 어울려 노는 것을 좋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어른들이 밀어 넣은 경쟁의 세계에서 조금이라도 내가 친구들보다 나은 점이 있다면 재빨리 그것을 이용하여 권력을 만들고 친구들 위에 군림하려 하는 것이다. 자신이 외롭고 힘이 들 때 그 상처를 치유하려 하기보다는 타인을 괴롭히고 그들에게 고통을 주는 것으로 그 상처를 덮어버리는 때가 더 많다. 그 어느 때보다 내면을 들여다보고 자신의 존재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해야 할 청소년의 시기에 외부 세계의 경쟁밖에 볼 줄 모르는 사람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안 그래도 내적으로 걷잡을 수 없을 만큼의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 살고 있는 아이들에게 그것을 달래고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줘야 할 기성세대들이 오히려 이 아이들을 더 거센 경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밀어 넣고 있는 현실. 실은 그렇게 살지 않아도 된다고 말을 해도 그러한 어른들의 말을 믿지 않는 아이들. 무엇을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할까. 기성세대들조차 휘청거리는 이 현실에서 아이들에게 등대와 같은 빛을 보여주는 것이 쉽지가 않다.
이 땅의 중 2들아. ‘헐떡이며 넘어가는 시간에 몸을 기대고 말없이 흘러가야만 하는’ 선생님이 많이 미안하구나. 다만 한 가지, 너희들이 스스로 가지고 있는 에너지가 분명 존재한다는 점을 꼭 기억해라. 힘들겠지만 그래도 너희들 중 일부라도 제발 그 에너지를 터뜨려 주기를. 그래서 밑도 끝도 없이 가라앉는 이 시대의 늪에서 발버둥 쳐서 떠올라 주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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