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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 사랑, 문학/[광장,청춘], [예스31],[ccmer] 칼럼

[예스31칼럼] 벽을 세우는 것, 타자화

삶, 사랑, 문학
제목 : 벽을 세우는 것, 타자화
 
나이든 남자가 혼자 밥 먹을 때
울컥, 하고 올라오는 것이 있다
큰 덩치로 분식집 메뉴 표를 가리고서
등 돌리고 라면발을 건져 올리고 있는 그에게,
양푼의 식은 밥을 놓고 동생과 눈 흘기며 숟갈 싸움하던
그 어린 것이 올라와, 갑자기 목메게 한 것이다
 
몸에 한세상 떠 넣어주는
먹는 일의 거룩함이여
이 세상 모든 찬밥에 붙은 더운 목숨이여
이 세상에서 혼자 밥 먹는 자들
풀어진 뒷머리를 보라
파고다 공원 뒤편 순댓집에서
국밥을 숟가락 가득 떠 넣으시는 노인의, 쩍 벌린 입이
나는 어찌 이리 눈물겨운가.
-황지우, 거룩한 식사-
 
오래전 이야기를 하나 하겠습니다. 근무하던 학교에서 부서별 회식이 있어서 한 선생님의 차에 모여 타고 회식 장소로 이동을 하던 중에 일어난 일입니다. 식당이 있는 골목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길도 좁고 시장 근처라 차들이 엉켜 있어 쉽게 들어가지 못하고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알고 보니 택시 한 대가 자기가 먼저 좁은 골목을 빠져 나가려고 무리하게 진행을 하고 있어서 그랬던 것 같습니다. 그 택시가 좁은 골목을 빠져 나가자 금방 그 상황이 정리가 되었고 차 안에 있던 사람들이 늘 그렇듯이 그 택시를 향해 다들 시끄럽게 한 마디씩 불평의 말을 던졌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운전하시는 분은 그런 불평의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 선생님은 “개인택시라면 욕해줄텐데 회사 택시라서 내가 그냥 참는다. 저 사람도 고생이지.”라고 말하셨습니다. 평소 그 분은 남의 흉을 잘 보고 온 세상 트집을 다 잡아내는 분이었는데 그런 말을 하셔서 좀 의외였습니다. 그래서 당시 사회 초년생이었던 저는 ‘역시 사회생활 오래 하신 분은 세상을 보는 눈이 다르구나.’ 하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그분의 말이 저를 잠시 혼란에 빠뜨린 것입니다. 그분은 바로 “오죽 먹고 살 게 없으면 회사 택시를 운전할까? 불쌍하지.”하면서 혀를 차고 비아냥거리는 겁니다.

그 순간 저는 궁금했습니다. 이 선생님의 마음은 동정일까, 아닐까? 착한 마음일까, 아닐까? 솔직히 그 말이 곱게 들리지는 않았으니 이렇게 오랫동안 기억에 남아 있는 거겠죠. 그 학교는 미션스쿨이었기 때문에 크리스천이 아닌 교사는 아예 근무의 기회조차 없었습니다. 당연히 그 선생님도 교회를 다니는 분이셨고요. 그래서 제가 조금 더 실망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또 한참이 지나서 몇 년 전 갈 길 바쁜 고3 학생들 수업을 할 때의 일입니다. 이 <거룩한 식사>라는 작품이 EBS 문제집에 실렸었습니다. 저는 별 생각 없이 학생들에게 이 작품에 등장하는 ‘나이든 남자’는 우리 주변 사람들 중 누구라고 생각하는지에 대해 써내라고 했습니다. (저는 수업 중에 학생들에게 자기 생각을 작은 쪽지에 써 내라고 합니다. 말로는 공개할 수 없는 부분이 나와 그 학생 사이의 1:1 대화로 이어질 수 있으니까요.) 대부분 객관식 문제 찍고 넘어가기 바쁜 타이밍에 제가 또 자기 생각을 써내라고 하니 귀찮았던지 대부분의 학생들은 대충 ‘불쌍한 사람’이라고 써낸 경우가 많았습니다. 저도 그 이상의 기대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대충 넘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비슷비슷한 답변 가운데 유독 눈에 들어오는 쪽지가 있었습니다. 한 여학생이 “나이 든 남자가 우리 아버지 같다.”고 쓴 겁니다. 그 여학생은 자기 아버지가 택시 운전을 하시는데 평소 밥을 드실 때 입을 크게 벌리고 많이 드신다고, 그리고 요새 아버지가 좀 늙으신 것 같아 안쓰럽다는 그런 내용의 쪽지였습니다. 순간 저는 십 수 년 전 겪었던 그 사건이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그 선생님의 그 마음이 동정인지 아닌지 고민했던 나에게 해답처럼 다가온 단어가 있었던 겁니다.
 
타자화(他者化-다른 사람의 인격이 나에 의해 대상화되고 물화되는 일).
 
사회적 관계 안에서 고민하는 현대인들에게 바로 타자화라는 말은 가장 경계해야 하는 단어일 것입니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자신과 다른 사람들 사이에 칼금을 그으며 살고 있습니다. 그래도 나는 저 사람보다는 나으니까 하는 마음으로 타인을 동정한다면 그것은 동정이 아니라 업신여기는 마음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동정이라는 감정은 두 가지 조건이 충족될 때 생긴다고 합니다. 하나는 타인의 고통이 그 자신의 잘못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우연히 닥친 비극이어야 하는 것, 또 하나는 그 비극이 언제든 나에게도 닥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그 조건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현대인들은 타인의 고통을 대부분 그 사람의 잘못된 행위에서 비롯된 필연적 결과로 보며, 자신은 그러한 불행을 예방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은연중에 자신과 타인이 뒤섞이지 않기를 원하고, 또 비슷한 사람들끼만 모여서 교류하고자 하고 그 집단과 집단 사이에는 높은 벽을 쌓아 올리는 것이지요. 가끔은 그 높은 벽 너머로 가끔 먹을 것이라도 던져주며 자족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처음 에피소드로 소개했던 그 선생님의 경우에는 ‘오죽 먹고 살 게 없으면 회사 택시를 할까.’라는 말에서 ‘나는 먹고 살기 괜찮으니 나처럼 좀 우월한 사람이 저런 사람 욕을 해봐야 얻을 게 뭐가 있냐. 그냥 불쌍하게 여기자.’라는 적선과도 같은 감정이었던 겁니다. 그리고 <거룩한 식사>에 등장하는 ‘나이든 남자’를 그저 ‘나와 상관은 없지만 불쌍하긴 한 어떤 사람’으로만 생각하는 학생들도 역시 이 경우에 속하겠지요. 그러나 진정한 연민의 감정이라 하기에는 부족함이 많아 보입니다.

그러나 남들이 다 불쌍하게 보는 그 사람을 향해 ‘우리 아버지 같다 ’고 말하는 그 학생의 경우는 다릅니다. 남들이 다 불쌍하게 보는 그 사람에게서 ‘우리 아버지’를 떠올렸기 때문입니다. 남들은 타인과의 관계에서 열심히 벽을 쌓아 올리는데 그 학생은 오히려 그 벽을 무너뜨린 것입니다. 택시운전을 하면서 열심히 살고 있는 자기 아버지가 늙어 보여서 안쓰럽다는 마음을 가진 이 학생이 과거 그 선생님이 했던 ‘오죽 먹고 살 게 없으면 불쌍하게...’라는 그 말을 들었다면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아버지가 열심히 생활하시는 게 고맙고 안쓰러운 마음을 갖는 것과 나와 사는 수준이 다른 사람들을 적선하듯 동정해주는 감정이 어찌 같을 수 있겠습니까.
이 세상 찬밥에 붙은 그 더운 목숨들을, 내 사정이 좀 낫고 내 수준이 더 높기 때문에 가끔 생각날 때마다 던져주듯이 불쌍하게 여기는 대상으로 여기는 것이 바로 타자화이지요. 반대로 그 벽을 무너뜨리고 우리 가족 같은 사람, 나와 다를 것이 없는 존재들로 품는 것은 ‘사랑’이라는 단어로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기쁨과 행복이 넘쳐야 하는 것도 맞지만 또 하늘의 보좌에서 연약한 인간들의 옆으로 성육신한 예수님을 생각하면 우리가 어떤 마음으로 이 시기를 보내야 하는지 알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성탄절에 특별히 구제 사역을 합니다. 몇 주 전부터 준비 팀으로부터 연계 상황을 연락받고 각 목장이나 팀 별로 기도를 모으고 마음을 모아 이 사역을 진행하고 있을 것입니다. 당연히 평소에도 이웃들을 돌보며 지내야 하겠지만 낮은 곳으로 오신 예수님의 사랑을 생각한다면 이 날은 조금 더 특별하게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을 품는 것도 좋은 일일 듯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 주의해야 할 것은 그들을 타자화하는 생각입니다. 그들은 그들의 잘못으로 어려움을 겪는 것도 아니며 내가 더 우월하기 때문에 그들을 돕는 것도 아닙니다. 또 어렵게 사는 사람들의 존재를 ‘나의 감사’의 이유로 여기는 것 역시 오히려 모든 영혼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마음에 부합하지 않는 생각일 것입니다. 그들의 존재도 나와 같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점을 기억하고 한 형제 자매로 품어낸다면 서로의 따뜻함이 이 겨울을 견디도록 해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