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산에서 내려오면 보이는 것
설악산 대청봉에 올라
발 아래 구부리고 엎드린 작고 큰 산들이며
떨어져 나갈까 봐 잔뜩 겁을 집어먹고
언덕과 골짜기에 바짝 달라붙은 마을들이며
다만 무릎께까지라도 다가오고 싶어
안달이 나서 몸살을 하는 바다를 내려다보니
온통 세상이 다 보이는 것 같고
또 세상살이 속속들이 다 알 것도 같다
그러다 속초에 내려와 하룻밤을 묵으며
중앙시장 바닥에서 다 늙은 함경도 아주머니들과
노령노래 안주해서 소주도 마시고
피난민 신세타령도 듣고
다음날에 원통으로 와서 뒷골목엘 들어가
지린내 땀내도 맡고 악다구니도 듣고
싸구려 하숙에서 마늘장수와 실랑이도 하고
젊은 군인부부 사랑싸움질 소리에 잠도 설치고 보니
세상은 아무래도 산 위에서 보는 것과 같지만은 않다.
지금 우리는 혹시 세상을
너무 멀리서만 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니면
너무 가까이서만 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신경림, <장자를 빌려 -원통에서>
지난 연말 즈음 무기력한 감정에 잠깐 빠져든 적이 있었습니다. 개인적인 이유가 아니어서 더 절망적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제가
사는 이 사회에 대한 실망감이 너무나 크게 다가온 겁니다.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사회를 보면서 도덕적 가치가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못하는 현실도
그렇고 세속화 되어가는 교회들도 안타까웠고 가까이로는 평소 정의와 공의를 외치는 지인들이 자기 자녀의 문제라면 모성이라는 이름으로 온갖 불의와
편법 따위를 아랑곳하지 않는 모습에 실망을 넘어선 무력감이 저를 짓눌렀던 겁니다. 과연 이 사회에 어떤 희망이 남아 있는 걸까. 왜 사람들은
이토록 이기적인가 하는 생각이 저를 사로잡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난 왜 화가 나 있는 거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게요. 저는 왜 화가 나 있던 걸까요. 무엇이 저를 무력하게 만든 것일까요? 제가 이 사회를 변화시키는 일에 무슨 노력을 그리 했다고 혼자 끓어 올랐다가 가라앉았다가 했던 걸까요? 그리고 요즘에만 특별히 불의한 것도 아닌데 언제부터 우리가 그리 정의로웠다고 며칠 동안 늘어져 스스로 절망 속으로 기어들어 갔던 걸까요?
이 마음을 추스리려고 할 때 즈음 영화 <레미제라블>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 영화를 본 사람들이 상처가 치유되었다느니 큰 은혜를 느낄 수 있었다느니 하는 말을 많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실패한 혁명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에서 무슨 힐링을 그리 받았을까 궁금하기도 했고 혹시 내 고민에 대한 해답도 찾을 수 있을까 하는 기대도 살짝 했었습니다. 남들만큼 큰 감동을 얻은 것은 아니지만 제 문제의 원인을 이 영화를 통해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영화의 처음 부분부터 자베르는 높은 곳에 올라서서 아래를 내려다 보고 있습니다. 그가 높은 곳에 서있던 이유는 죄수들이 제대로 일을 하나 지켜보기 위함이었지요. 감시와 통제. 이것이 자베르의 임무였습니다. 그는 법을 지키는 것으로 세상을 위해 일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자기 뿐만 아니라 타인에게도 원리 원칙을 철저하게 강요했지요. 그는 고뇌할 때도 높은 난간 위에서 아슬아슬하게 서서 노래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신념이 무너짐을 느낄 때 그는 몸을 아래로 던져 삶을 포기합니다. 높은 곳에서 내려오는 방법을 몰랐던 겁니다. 반면 마들렌으로 이름을 바꾼 장발장은 빈민들이 사는 거리를 걸어 다니며 사람들과 눈높이를 맞추고 그들 손에 직접 돈을 쥐어 줍니다. 자베르가 말을 탄 채 그들을 통제하는 모습과 대조적이었습니다.
자베르가 내려다 보는 세상은 전체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위치였습니다. 그곳에서는 규칙을 어기는 사람은 바로 찾을 수 있겠지만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 그 개별적인 상황은 볼 수가 없습니다. 그는 판틴이 법을 지켰는지 어겼는지를 판단하는 것만이 중요했고 판틴의 설명을 듣기를 거부하며 그녀를 체포하려 합니다. 그러나 장발장은 판틴이 왜 거리에 내몰렸는지 알고 싶어 했습니다. 그는 판틴과 대화를 시도했고 의도하지 않은 무관심 때문에 판틴이 거리로 쫓겨날 수밖는 상황이었음을 알고는 그녀를 도우려 합니다. 이것이 이 두 인물의 서로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처음 소개한 <장자를 빌려-원통에서>의 화자는 동시에 두 가지 경험을 하게 됩니다. 설악산 대청봉에 올라섰을 때는 온통 세상이 다 보이는 것 같고 세상살이 속속들이 다 알 것도 같았습니다. 또 발 아래 모든 것들이 자기에게 겁을 먹고 엎드려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막상 산에서 내려와 보니 우리가 사는 세상은 멀리서 내려다 보는 것과는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지린내 땀내도 맡고 악다구니도 듣고 사랑싸움질에 잠도 설치는 산 아래의 세상은 산 위에서는 알 수 없는 모습이었죠. 이 작품의 제목이 <장자를 빌려>인 이유는 이 작품이 장자의 <추수편>에 나오는 '큰 지혜는 멀리서도 보고 가까이서도 본다'는 구절을 빌려왔기 때문입니다. 삶을 바라볼 때 두 관점을 모두 취해야 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때로는 높은 곳에 올라가서 우리가 과연 바른 길로 가고 있는지 방향도 체크해보고 우리 모습을 스스로 점검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중용이 정답은 아닌 것 같습니다. 높은 보좌에서 낮은 죄인들 곁으로 찾아 오신 예수님을 생각해 본다면 대청봉 정상보다는 속초 중앙시장바닥이 우리가 주로 있어야 할 곳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시 정리해보겠습니다. 저는 왜 무기력함을 느꼈던 것일까요. 그것은 저도 모르게 높은 곳에 올라가서 이 세상을 내려다 보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위에서 내려다 보니 이 사회는 내가 생각한 '정의'라는 기준에 한참 어긋나 있었고 그것 떄문에 화가 났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걸 바로 잡을 방법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절망했던 겁니다. 그러나 이 사회가 그리 쉽게 변화할 수 있는 곳인가요? 이 점을 잠시 잊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무슨 능력으로 이 땅을 천국으로 만들 수 있겠습니까? 법과 제도가 이 세상을 바로 잡을 수 있을까요? 자베르가 그토록 지키려고 했던 법과 제도 역시 인간의 한계를 드러낼 수밖에 없었는데요. 그런데 저는 혹시나 정의를 이 땅에서 이룰 수 있을까 하며 기대하고 있었나 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저는 자베르처럼 법을 어긴 사람들에게 실망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리케이트 안에서 숭고한 죽음을 택한 젊은 혁명군들 뒤로 그들을 외면하고 문을 닫아버린 시민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가구를 던져줄 수는 있어도 그들을 집 안으로 받아들여 주지 않았던 거죠. 저는 그 사람들을 원망하고 미워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들 때문에 혁명이 실패했다고 판단했던 거죠. 그러나 돌이켜보면 그들은 혁명군을 죽인 악역이 아니라 우리 곁에서 함께 사는 평범한 이웃들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 늘 있는 사람들이고 나도 그들 중 하나가 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물론 우리는 믿음을 지키며 세상 사람들과는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기적이고 세속적인 생각에서 벗어나 더 높고 넓은 가치를 추구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도 역시 연약한 종들이고 위기의 상황에서는 늘 흔들립니다. 이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내 믿음 하나 지키고 사는 것도 어려운데 제가 무슨 자격으로 산 위로 올라가서 그들에게 손가락질이나 하고 있었던 걸까요. 결국 나의 절망은 나의 교만에서 온 것이었습니다. 산에서 내려와 시장 바닥을 돌아다녀야 그들의 삶을 들여다볼 수 있고 그래야 왜 그들이 문을 굳게 걸어 잠글 수밖에 없었는지를 이해하고 그들을 품을 수 있었을 텐데요.
가끔 산 위로 올라가 우리가 하나님과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걸어가고 있는지 체크할 필요가 있을 겁니다. 그러나 묵묵히 산 아래로 내려와 시장 바닥에서 이웃들과 함께 울고 웃고 노래하며 살아가는 것이 예수님의 성육신과 연결되는 우리의 삶이 아닐까 합니다. 그러다보면 하나님의 역사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경험하고 그 은혜에 감동하기도 할 것입니다. 문을 닫아버린 시민들 때문에 실패한 것처럼 보였던 젊은이들의 죽음이 사실은 실패가 아니라 역사의 큰 줄기로 연결되는 위대함이라는 것도 알게 되겠지요.
삶이란 이 세상을 완성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일하시는 과정을 바라보는 것이며 그래서 실망이나 좌절은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
이것이 은혜로 새 삶을 시작한 장발장의 모습에서 얻은 깨달음이었습니다. 공의를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고 우리는 그저 그 길에서 벗어나지 않기
위해 힘써 노력하며 살아갈 뿐입니다. 높은 곳에 올라서서 세상의 질서를 힘으로 지키고자 애쓰지 않고 오로지 주님과 함께 산 아래로 내려와 나와
이웃들의 삶을 들여다 보는 것. 이것이 저의 2013년 기도제목입니다. 지금 당장 희망이 보이지 않더라도 은혜를 바라며 이 길을 걸어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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