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 수 꾼
이강백(李康白)
등장 인물
해설자, 파수꾼 가, 파수꾼 나(노인), 파수꾼 다(소년)
파수꾼 ‘나’는 확신 있게 양철북을 두드린다. ‘다’는 여느 때와는 달리 침착하게 일어선다. 그리고 담요를 벗어 네모 반듯하게 갠 다음 식탁 위에 놓는다. 그는 북을 두드리는 나를 바라보면서 몹시 안타까운 표정이 된다.
가 : 북소리 중지! 이리 떼는 물러갔다.
다 : 정말 이리가 있다구 믿으세요?
나 : 보렴, 방금도 이리 떼가 오질 않았니? 그렇지 않다면 내가 왜 양철북을 치며 평생을 보냈겠느냐? 서운하다. 아무리 아픈 애라지만 너무 심한 말을 하는구나.
다 : 죄송해요. 하지만 어쩜 그 많은 나날을 단 한 번도 의심없이 보내셨어요?
나 : 넌 그렇게도 무섭니, 이리가?
다 : 오히려 이리가 있다고 믿었던 때가 좋아던 것 같아요. 그땐 숨기라도 했으니까요. 땅에 엎드리며 아늑하게 느껴졌어요. 지금은요, 이리가 없으니 땅에 엎드려야 아무 소용없구요, 양철북도 쓸모가 없게 됐어요. 오직 이제는 제가 본 그 사실만을 말하고 싶어요.
해설자, 촌장이 되어 등장. 검은 옷차림. 이해심이 많아 보이는 얼굴과 정중한 태도. 낮고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한다.
촌장 : 수고하시는군요, 파수꾼님.
나 : 아, 촌장님. 여긴 웬일이십니까?
촌장 : 추억을 더듬으러 왔습니다. 이 황야는 내가 어린 시절 야생 딸기를 따러오곤 했던 곳이지요. 그땐 이리가 무섭지도 않았나 봐요. 여기저기 덫이 깔려 있고 망루 위의 파수꾼이 외치는데도 어린 난 딸기 따기에만 열중했었으니까요. 그 즐거웠던 옛 추억, 오늘 아침 나는 그 추억을 상기시켜 주는 편지를 받았습니다. 그래 이 곳엘 찾아온 거예요.
나 : 잘 오셨습니다, 촌장님.
촌장 : 오래 뵙지 못했더니 그 동안 흰 머리가 더 많아지셨군요.
나 : 촌장님두요, 더 늙으셨어요.
촌장 : 오다 보니까 저쪽 덫에 이리가 치어 있습디다.
나 : 이리요? 어느 쪽이죠?
촌장 : 저쪽요, 저쪽. 찔레 덩쿨 밑이던가요…….
나 : 드디어 잡는군요!
파수꾼 ‘나’ 퇴장. 촌장은 편지를 꺼내 ‘다’에게 보인다.
촌장 : 이것, 네가 보낸 거니?
다 : 네, 촌장님.
촌장 : 나를 이곳에 오도록 해서 고맙다. 한 가지 유감스러운 건, 이 편지를 가져 온 운반인이 도중에서 읽어 본 모양이더라. ‘이리 떼는 없구, 흰구름뿐.’ 그 수다쟁이가 사람들에게 떠벌리고 있단다. 조금 후엔 모두들 이 곳으로 몰려올거야. 물론 네 탓은 아니다. 넌 나 혼자만을 와달라구 하지 않았니? 몰려오는 사람들은 말하자면 불청객이지. 더구나 어떤 사람은 도까까지 들고 온다더라.
다 : 도끼를 왜 들고 와요?
촌장 : 망루를 분순다고 그런단다. ‘이리 떼는 없구, 흰구름뿐.’ 이것이 구호처럼 외쳐지구 있어. 그 성난 사람들만 오지 않는다면 난 너하구 딸기라도 따러 가고 싶다. 난 어디에 딸기가 많은지 알고 있거든. 이리 떼를 주의하라는 팻말 밑엔 으레히 잘 익은 딸기가 가득하단다.
다 : 촌장님은 이리가 무섭지 않으세요?
촌장 : 없는 걸 왜 무서워하겠니?
다 : 촌장님도 아시는군요?
촌장 : 난 알고 있지.
다 : 아셨으면서 왜 숨기셨죠? 모든 사람들에게, 저 덫을 보러 간 파수꾼에게, 왜 말하지 않는 거예요?
촌장 : 말해 주지 않는 것이 더 좋기 때문이다.
다 : 거짓말 마세요, 촌장님! 일생을 이 쓸쓸한 곳에서 보내는 것이 더 좋아요? 사람들도 그렇죠! ‘이리 떼가 몰려 온다.’ 이 헛된 두려움에 시달리는데 그게 더 좋아요?
촌장 : 얘야, 이리 떼는 처음부터 없었다. 없는 걸 좀 두려워한다는 것이 뭐가 그렇게 나쁘다는 거냐? 지금까지 단 한 사람도 이리에게 물리지 않았단다. 마을은 늘 안전했어. 그리고 사람들은 이리 떼에 대항하기 위해서 단결했다. 그들은 질서를 만든 거야. 질서, 그게 뭔지 넌 알기나 하니? 모를 거야, 너는. 그건 마을을 지켜 주는 거란다. 물론 저 충직한 파수꾼에겐 미안해. 수천개의 쓸모 없는 덫들을 보살피고 양철북을 요란하게 두들겼다. 허나 말이다. 그의 일생이 그저 헛되다고만 할 순 없어. 그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 고귀하게 희생한 거야. 난 네가 이러한 것들을 이해해 주기 바란다. 만약 네가 새벽에 보았다는 구름만을 고집한다면, 이런 것들은 모두 허사가 된다. 저 파수꾼은 늙도록 헛북이나 친 것이 되구, 마을의 질서는 무너져 버린다. 얘야, 넌 이렇게 모든 걸 헛되게 하고 싶진 않겠지?
다 : 왜 제가 헛된 짓을 해요? 제가 본 흰구름은 아름답고 평화로웠어요. 저는 그걸 보여 주려는 겁니다. 이제 곧 마을 사람들이 온다죠? 잘 됐어요. 저는 망루 위에 올라가서 외치겠어요.
촌장 : 뭐라구? (잠시 동안 침묵을 지킨 후에 웃으며) 사실 우습기도 해. 이리 떼? 그게 뭐냐? 있지도 않는 그걸 이 황야에 가득 길러 놓구, 마을엔 가시 울타리를 둘렀다. 망루도 세웠구, 양철북도 두들기구, 마을 사람들은 무서워서 떨기도 한다. 아하, 언제부터 네가 이런 거짓놀이에 익숙해졌는지 모른다만, 나도 알고는 있지. 이 모든 것이 잘못되어 있다는 걸 말이다.
다 : 그럼 촌장님, 저와 같이 망루 위에 올라가요. 그리구 함께 외치세요.
촌장 : 그래, 외치마.
다 : 아, 이젠 됐어요!
촌장 : (혼자말처럼) …… 그러나 잘 될까? 흰구름, 허공에 뜬 그것만 가지구 마을이 잘 유지될까? 오히려 이리 떼가 더 좋은 건 아닐지 몰라.
다 : 뭘 망설이시죠?
촌장 : 아냐. 아무 것두……난 아직 안심이 안 돼서 그래. (온화한 얼굴에서 혀가 낼름 나왔다가 들어간다.) 지금 사람들은 도끼까지 들구 온다잖니? 망루를 부순 다음엔 속은 것에 더욱 화를 낼 거야! 아마 날 죽이려구 덤빌지도 몰라. 아니 꼭 그럴 거다. 그럼 뭐냐? 지금까진 이리에게 물려 죽은 사람은 단 한명도 없었는데, 흰구름의 첫날 살인이 벌어진다.
다 : 살인이라구요?
촌장 : 그래, 살인이지. (난폭하게) 생각해 보렴, 도끼에 찍힌 내 모습을. 피가 샘솟듯 흘러내릴 거다. 끔직해. 얘, 너는 그런 꼴이 되길 바라고 있지?
다 : 아니에요, 그건!
촌장 : 아니라구? 그렇지만 내가 변명할 시간이 어디 있니? 난 마을 사람들에게 왜 이리 떼를 만들었는지, 그걸 알려 줘야 해. 그럼 그들도 날 이해해 줄거야.
다 : 네 그렇게 말씀하세요.
촌장 : 허나 내가 말할 틈이 없다. 사람들이 오면, 넌 흰구름이라 외칠 거구, 사람들은 분노하여 도끼를 휘두를 테구, 그럼 나는, 나는…… (은밀한 목소리로) 얘, 네가 본 그 흰구름 있잖니, 그건 내일이면 사라지고 없는 거냐?
다 : 아뇨. 그렇지만 난 오늘 외치구 싶어요.
촌장 : 그것 봐. 넌 내 피를 보고 싶은 거야. 더구나 더 나쁜 건, 넌 흰구름을 믿지도 않아. 내일이면 변할 것 같으니까, 오늘 꼭 외치려구 그러는 거지. 아하, 넌 네가 본 그 아름다운 걸 믿지도 않는구나!
다 : (창백해지며) 그건, 그건 아니에요!
촌장 : 그래? 그럼 너는 내일까지 기다려야 해. (괴로워하는 파수꾼 다를 껴안으며) 오늘은 나에게 맡겨라. 그러면 나도 내일은 너를 따라 흰구름이라 외칠테니.
다 : 꼭 약속하시는 거죠?
촌장 : 물론 약속하지.
다 : 정말이죠. 정말?
촌장 : 그럼. 정말 약속한다니까.
파수꾼 나가 들어온다.
나 : 또 헛치었습니다. 이리는 워낙 교활해서요. 친 것 같아도 가 보면 달아나구 없어요.
촌장 : 다음에는 꼭 잡히겠지요.
나 : 미안합니다. 이번에 잡았더라면 그 껍질을 촌장님께 선사하구 싶었는데…….
촌장 : 받은 거나 다름없이 감사합니다.
나 : (촌장에게 안겨 있는 다를 가리키며) 그 앤 지금 몹시 아픕니다.
촌장 : 네, 열이 있는 것 같군요.
나 : 간밤에 담요를 덮지 않아서 병이 났어요.
촌장 : 이만한 나이 때 누구나 한 번씩은 앓는 병이겠지요.
나 : 내 잘못이었어요. 담요를 꼭 덮어 줘야 하는 건데.(다에게) 얘야, 난 널 좋아해. 아픈 것 빨리 좀 나아 주렴.
다 : (힘없이 웃으며)……고마워요.
나 : (관객석 쪽으로 돌아서다가, 흠칫 놀라며) 웬 사람들이 이렇게 몰려오죠?
촌장 : 마을 사람들이지요.
나 : 마을 사람들요?
촌장 : (관객들을 향해) 어서 오십시시오, 주민 여러분. 이 애가 그 말을 꺼낸 파수군입니다. 저기 방긋 웃고 있는 식량 운반인. 이 애가 틀림없지요? 네. 그렇다고 확인했습니다. 이리 떼인지 이니면 흰구름인지, 직접 이 아이의 입을 통하여 들어 봅시다.
파수꾼 다, 쓰러질 것 같은 걸음으로 망루를 향해 걸어간다. 나가 근심스럽게 쫓아간다.
나 : 얘야, 괜찮겠니?
다 : …… 네.
나 : 아무래도 걱정이 되는구나. 넌 이리 떼란 말만 들어도 벌벌 떠는 겁쟁인데. 망루 위에 올라가서 엎드리면 안 돼.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널 보러 오지 않았니? 얼마나 큰 영광이냐. 이 기회에 말이다, 넌 너 자신이 파수꾼이라는 걸 힘껏 자랑해야 한다. 알았지, 응?
촌장 그만 올라가게 하십시오.
파수꾼 다는 망루 위에 올라간다. 긴 침묵. 마침내 부르짖는다.
다 : 이리 떼다! 이리 떼가 몰려온다!
파수꾼 가의 손이 번쩍 들려지며 그도 외친다. 파수꾼 나는 신이 나서 양철북을 두드린다. 북소리, 한동안 계속된다.
가 : 북소리 중지! 이리 떼는 물러갔다.
촌장 : 주민 여러분! 이것으로 진상은 밝혀졌습니다. 흰구름은 없으며 이리 떼 뿐입니다. 이 망루는 영구히 유지되어야겠지요. 양철북도 계속 쳐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다음 이리의 습격 때까진 잠시 시간적 여유가 있습니다. 그 틈을 이용하여 돌아가십시오. 가시거든 마을 광장에 다시 모이시기 바랍니다. 수다쟁이 운반인의 처벌을 논의합시다. 그럼 어서 돌아가십시오. 이리 떼가 여러분을 물어뜯으러 옵니다.
망루 위에서 파수꾼 다가 내려온다.
나 : 난 네가 이렇게 용감해질 줄은 몰랐구나.
촌장 : 고맙다. 정말 잘해 주었다.
나 : 아냐, 난 몰랐던 건 아니었어. 넌 나에게 용감한 사람이 되마구 약속하질 않았니? 난 그 때 이미 알아본거야, 넌 꼭 훌륭한 파수꾼이 될 거라구.
촌장 : 얘, 나 좀 보자. (한갓진 곳으로 데리고 가서) 너한테는 안됐다만, 넌 이 곳에서 일생을 지내야 한다.
다 : …… 네?
촌장 : 마을엔 오지 말아라.
다 : (침묵)
바람 부는 소리가 거칠게 들려온다.
촌장 : 난 저 사람들이 싫어. 내 마음은 너와 함께 딸기 따기에 가 있다. 넌 내 추억이야. 너에게는 내가 늘 그리워하던 것이 있다.
사이.
촌장 : …… 하지만, 여긴 너무 쓸쓸해.
사이.
촌장 ……미안하다.
사이.
촌장 : 그럼 잘 있거라.
나 : 가시려구요, 촌장님?
촌장 :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어서요.
나 : 제가 저만큼 바래다 드리지요. 덫도 좀 살펴볼 겸 해서요. (함께 걸어가며) 그런데 말입니다, 양철북을 치던 내 모습이 멋있지 않던가요?
촌장과 파수꾼 나, 퇴장한다. 바람소리만이 더욱 거칠어진다. 잠시 후, 망루 위의 파수꾼이 ‘이리 떼다!’ 외친다. 파수꾼 다는 조용히 양철북을 두드리기 시작한다.
――막.
<이강백, 희곡 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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