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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 사랑, 문학/[광장,청춘], [예스31],[ccmer] 칼럼

[예스삼일칼럼] 나도 북어다

삶, 사랑, 문학

제목 : 나도 북어다


밤의 식료품가게

케케묵은 먼지 속에

죽어서 하루 더 손때 묻고

터무니없이 하루 더 기다리는

북어들,

북어들의 일 개 분대가

나란히 꼬챙이에 꿰어져 있었다.

나는 죽음이 꿰뚫은 대가리를 말한 셈이다.

한 쾌의 혀가

자갈처럼 죄다 딱딱했다.

나는 말의 변비증을 앓는 사람들과

무덤 속의 벙어리를 말한 셈이다.

말라붙고 짜부라진 눈,

북어들의 빳빳한 지느러미.

막대기 같은 생각

빛나지 않는 막대기 같은 사람들이

가슴에 싱싱한 지느러미를 달고

헤엄쳐 갈 데 없는 사람들이

불쌍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느닷없이

북어들이 커다랗게 입을 벌리고

거봐, 너도 북어지 너도 북어지 너도 북어지

귀가 먹먹하도록 부르짖고 있었다.

-최승호, <북어>-



감추고 싶었던 내 모습을 들킨 것처럼 나를 부끄럽게 만드는 작품들이 있다. 이 작품도 그 중 하나다. ‘북어’라고 하면 다들 비슷한 이미지를 떠올릴 것이다. 바싹 말라서 더 이상 그 안에 생기라는 것이 남아 있지 않고 퀭한 눈, 의미 없이 벌린 입으로 팔려가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그 모습. 시인은 밤이라는 암흑의 시간에 식료품가게에서 죽고 나서 먼지를 뒤집어 쓴 채 의미 없이 진열되어 있는 그 북어를 발견한다.


그런데 북어가 꼬챙이에 꿰어져 있는 모습을 ‘일 개 분대’라고 비유하고 있다. 북어의 대가리를 꿰뚫은 그 죽음은 바로 이러한 군부독재의 획일화에서 온 것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북어는 혀가 자갈처럼 딱딱해서 해야 할 말을 하지 못한다. (‘말의 변비증’이라는 표현이 재밌다. 변비라는 것은 원래 배설해야 할 것을 배설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쓰이는 말이지 배설할 것이 없는 데 이 단어를 쓰지는 않기 때문이다.) 말라붙고 짜부라져서 봐야할 것을 외면하는 눈, 빳빳하게 굳어진 지느러미로 헤엄치는 자유를 잃은 북어, 그리고 이어지는 막대기처럼 딱딱하고 죽어 있는 생각들. 시인은 북어에게서 죽은 후 무덤 속에 있는 것같은 현대인들을 발견해낸 것이다.


믿음으로 산다는 사람들 중 스스로 생각하는 것을 멈추는 사람들을 종종 보게 된다. 아무 것도 생각하지 말고, 아무 것도 행동하지 않으면 모든 것을 다 하나님이 채워주시는 것일까? 우리는 언제 멈춰야 하는가? 나의 이익이 타인의 손해가 됨을 아는 순간. 아무도 보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며 불법을 저지르는 그 순간. 내 이름이 하나님보다 앞서 나가려는 순간. 이러할 때에 생각을 비우고 우리의 발걸음을 멈춰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런데 이상하게도 어려운 이웃과 함께 삶을 나누어야 할 때, 내가 베풀어야 할 사랑이 아직도 빚더미로 남아 있을 때, 그들과 함께 불의와 싸워야 할 그 때에 오히려 행동하지 않고 머리를 비우고 멈춰버린다. 심지어 이런 순간에 행동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사람의 의지로만 인간의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며 비난하고 손가락질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결국은 말로는 하나님이 채워주실 것이라 생각하면서도 그 안에는 이기적인 욕망이 감춰 있다는 말이다.


군부 독재 시절, 두렵고 무서워서 생각을 멈추고 해야 할 말을 하지 않고 스스로 자유를 반납한 채 무덤 속에서 살았던 북어 같은 사람들. 그런데 문제는 다음에 드러난다. 화자는 이러한 북어들을 ‘불쌍하다’고 생각한다. 아마도 대가리게 꿰어진 채 어두운 식료품점 안에 전시되어 있는 북어들을 보면서 화자는 혀를 끌끌 찼을 것이다. 얼마나 한심하고 답답해 보였을까. 그런데 그 순간 북어들이 그 딱딱하게 굳어진 입을 벌려 말을 한다. ‘너도 북어지! 너도 북어지! 너도 북어지!’ 메아리쳐 들려오는 이 부르짖음에 화자는 도망하지도 못한 채 귀가 먹먹해질 때까지 그 자리에 멈춰 서 있다. 북어와 같은 현대인들을 한심하게 바라봤던 화자는, 실은 자신의 삶도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내가 이 지면을 빌려 글을 쓰는 대부분의 작품들은 최근 학생들과 수업한 내용들이다. 주로 고3인 이 학생들은 당장 눈앞의 입시 준비 때문에 글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기 보다는 지식적으로 접근하려는 경향이 크다. 그럴 때마다 조심스럽게 문학을 나의 이야기로 생각하라고 조언을 해준다. 그러나 학생들은 삶의 경험이 많지 않기 때문에 작품을 자기 삶으로 읽는 것이 아주 쉽지만은 않다. 그래서 나는 내 경험을 섞어서 설명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북어>의 화자와 같이 감추고 싶지만 조금만 방심하면 마구 튀어 나오는, 나는 저들과 다른 수준으로 살아 왔다고 생각하는 이 철 없는 교만함을 학생들에게 털어놓으면, 학생들이 어떻게 생각하건 나는 속죄하는 기분이 든다. ‘그들의 한심함’에 대한 작품이 아니라 ‘우리의 부끄러움’에 대한 작품으로 읽게 되면, 그 다음에 우리가 타인을 대할 때, 또 이 사회를 살아갈 때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 긴 설명이 필요 없다. 조심해야 할 것은 이 작품은 ‘함부로 비판하지 말자’를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자기 자신까지도 비판의 대상에 포함시키며 치열하게 부정적인 세상에 맞서려는 시인의 의도를 읽어야 한다. 입만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입도 살아 있도록, 그렇게 오늘도 시 한 편을 읽으며 나 자신을 채찍질한다. 그래, 나도 북어다! 그렇지만 계속 죽은 채로 지내지는 않으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