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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 사랑, 문학/[광장,청춘], [예스31],[ccmer] 칼럼

[예스삼일 칼럼] 부끄러움 삶, 사랑, 문학 제목 : 부끄러움 활자(活字)는 반짝거리면서 하늘 아래에서 간간이 자유를 말하는데 나의 영(靈)은 죽어 있는 것이 아니냐 벗이여 그대의 말을 고개 숙이고 듣는 것이 그대는 마음에 들지 않겠지 마음에 들지 않아라 모두 다 마음에 들지 않아라 이 황혼도 저 돌벽 아래 잡초도 담장의 푸른 페인트빛도 저 고요함도 이 고요함도 그대의 정의도 우리들의 섬세도 행동이 죽음에서 나오는 이 욕된 교외에서는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마음에 들지 않아라 그대는 반짝거리면서 하늘 아래서 간간이 자유를 말하는데 우스워라 나의 영(靈)은 죽어 있는 것이 아니냐 -김수영, 시인 김수영은 살아있음에 대한 시를 많이 썼다. 사는 것과 살아있는 것은 다르다. 그냥 ‘사는 것’과는 달리 ‘살아있는 것’은 부정적 상황 가운데.. 더보기
[예스삼일칼럼] 순종 삶, 사랑, 문학 제목 ; 순종 산비탈에 비를 맞으며 소가 한 마리 서 있다 누군가 끌어가기를 기다리며 멍청하게 그냥 서 있다 소는 부지런히 많은 논밭을 갈았고 소는 젖으로 많은 아이를 길렀고 소는 고기로 많은 사람을 살찌게 했다 도살장으로 가는 트럭 위에 소들이 가득 실려 있다 죽으러 가는지를 알면서도 유순하게 그냥 실려 있다 소들은 왜 끌려만 다니는가 소들은 왜 죽으러 가는가 소들은 왜 뿔을 가지고 있는가 -김광규 글을 쓸 때 늘 주의하는 것은 내가 누구를 가르칠 수준이 아니라는 점을 계속 상기하는 것이다. '~해야 한다'는 식의 정답을 알려줄 만큼 내 삶의 무게가 묵직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평소에는 함께 고민하고 함께 깨닫고 서로 위로해줄 수 있는 글을 쓰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그런데 오늘은 가르치.. 더보기
[예스삼일칼럼] 절제 절제 저는 환경운동가도 아니고 생태환경에 대해 특별히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지극히 평범한 관점에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얼마 전 인도네시아 사향고양이 배설물에서 나온 커피콩으로 만든다는 코피 루왁(Kopi Luwak)에 대한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물론 저는 구경조차 한 적도 없습니다만). 공장식으로 좁은 우리에 소를 가두고 사육하는 미국의 어느 목장 사진을 보았기 때문에 그렇다면 루왁 커피도 공장식 사육을 할 수도 있겠다는 상상을 했던 것입니다. 이런 상상을 하게 된 이유는 루왁 커피 자체가 그 맛보다도 쉽게 접할 수 없는 희귀성이 특징이고 당연히 루왁 커피는 모두 자연산이라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고가이기도 하고요. 저는 이런 순진한 생각을 페이스북에 올렸습니다. ‘잔인한 인간은.. 더보기
[예스삼일칼럼] 특별함 참 맑아라겨우 제 이름밖에 쓸 줄 모르는열이, 열이가 착하게 닦아놓은유리창 한 장먼 해안선과 다정한 형제섬그냥 그대로 눈이 시린가을 바다 한 장열이의 착한 마음으로 그려놓은아아, 참으로 맑은 세상 저기 있으니 정일근, 은 연작시로 시인이자 경남대 국문과 교수인 정일근이 대학을 막 졸업하고 근무했던 진해의 한 중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쓴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그 연작시의 열 번째이자 마지막 작품이고요. 아마도 제7차 교육과정 때부터 지금까지 중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수록되어 있기 때문에 많은 분들이 이 작품을 알고 있을 거라 생각됩니다.앞 건물에 가려 바다가 보이지 않는 교실도 많았지만 유독 정일근 선생님 반의 교실에서만 바다가 잘 보였다고 합니다. 환경미화심사를 앞두고 학생들에게 “우리교실에서는 바.. 더보기
[예스삼일칼럼] 어른이 되는 것 삶, 사랑, 문학 제목 : 어른이 되는 것.. 오솔길 가운데 낯선 거미줄 아침 이슬 반짝이니 거기 있음을 알겠다. 허리 굽혀 갔다, 되짚어오다 고추잠자리 망에 걸려 파닥이는 걸 보았다. 작은 삶 하나, 거미줄로 숲 전체를 흔들고 있다. 함께 흔들리며 거미는 자신의 때를 엿보고 있다. 순간 땀 식은 등 아프도록 시리다. 그래, 내가 열아홉이라면 저 투명한 날개를 망에서 떼어 내 바람 속으로 되돌릴 수 있겠지 적어도 스물아홉, 서른아홉이라면 짐짓 몸 전체로 망을 밀고 가도 좋을 게다 그러나 나는 지금 마흔 아홉 홀로 망을 짜던 거미의 마음을 엿볼 나이 지금 흔들리는 건 가을 거미의 외로움임을 안다. 캄캄한 뱃속, 들끓는 열망을 바로 지금, 부신 햇살 속에 저토록 살아 꿈틀대는 걸 바꿔 놓고자 밤을 지새운 거.. 더보기
[예스삼일칼럼] 꽃 피우지 않아도 괜찮아 삶, 사랑, 문학 제목: 꽃 피우지 않아도 괜찮아 꽃나무라고 늘 꽃 달고 있는 건 아니다 삼백 예순 닷새 중 꽃 피우고 있는 날보다 빈 가지로 있는 날이 훨씬 더 많다 행운목처럼 한 생에 겨우 몇 번 꽃을 피우는 것들도 있다 겨울 안개를 들판 끝으로 쓸어내는 나무들을 바라보다 나무는 빈 가지만으로도 아름답고 나무 그 자체로 존귀한 것임을 생각한다 우리가 가까운 숲처럼 벗이 되어 주고 먼 산처럼 배경 되어 주면 꽃 다시 피고 잎 무성해지겠지만 꼭 그런 가능성만으로 나무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 빈 몸 빈 줄기만으로도 나무는 아름다운 것이다 혼자만 버림받은 듯 바람 앞에 섰다고 엄살떨지 않고 꽃 피던 날의 기억으로 허세 부리지 않고 담담할 수 있어서 담백할 수 있어서 나무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운 것이다 .. 더보기
[예스삼일칼럼] 등불을 밝히고 창 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은 나의 나라. 시인이란 슬픈 천명(天命)인 줄 알면서도 한 줄 시를 적어볼까. 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품긴 보내 주신 학비 봉투를 받어 대학 노트를 끼고 늙은 교수 강의 들으러 간다. 생각해 보면 어린 때 동무들 하나, 둘, 죄다 잃어버리고 나는 무엇을 바라 나는 다만, 홀로 침전하는 것일까?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창 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 -윤동주, 쉽게 씌어진 시- * 육첩방 : 다다미를 여섯 장씩 깔아놓은 일본식 작은 방 1945년 2월 16일은 윤동주 시.. 더보기
[예스삼일칼럼] 직면 2008년에 쓴 글입니다. -------------------------------------------------------------- 창 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은 나의 나라. 시인이란 슬픈 천명(天命)인 줄 알면서도 한 줄 시를 적어볼까. 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품긴 보내 주신 학비 봉투를 받어 대학 노트를 끼고 늙은 교수 강의 들으러 간다. 생각해 보면 어린 때 동무들 하나, 둘, 죄다 잃어버리고 나는 무엇을 바라나는 다만, 홀로 침전하는 것일까?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창 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 더보기
지금은 절망 아닌 기다림의 시기(레미제라블 리뷰) [소리]에 기고한 글입니다.http://www.cry.or.kr/news/articleView.html?idxno=5703 지금은 절망 아닌 기다림의 시기[영화 '레미제라블'을 보고] 남은 자로 살기로 함 ▲ ⓒUPI 코리아영화를 보는 동안 내 마음을 불편하게 한 인물은 자베르가 아니라 민중들이었다. 젊은 혁명군들이 바리케이트를 지켜내지 못하고 도망다닐 때 숨겨달라 두드린 문을 매몰차게 닫아버린 그 사람들 말이다. 지난 연말 나는 몸과 마음을 동시에 앓았다. 한동안 대선 결과를 믿지 못했고 내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도둑맞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진실은 죽었고 정의의 싹은 잘려 나갔으며 더이상 도덕적 가치가 아무 의미도 지니지 못하는 시대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 와중에 더 높은 도덕적 가치를 지켜.. 더보기
[예스31칼럼] 산에서 내려와야 보이는 것 제목 : 산에서 내려오면 보이는 것 설악산 대청봉에 올라 발 아래 구부리고 엎드린 작고 큰 산들이며 떨어져 나갈까 봐 잔뜩 겁을 집어먹고 언덕과 골짜기에 바짝 달라붙은 마을들이며 다만 무릎께까지라도 다가오고 싶어 안달이 나서 몸살을 하는 바다를 내려다보니 온통 세상이 다 보이는 것 같고 또 세상살이 속속들이 다 알 것도 같다 그러다 속초에 내려와 하룻밤을 묵으며 중앙시장 바닥에서 다 늙은 함경도 아주머니들과 노령노래 안주해서 소주도 마시고 피난민 신세타령도 듣고 다음날에 원통으로 와서 뒷골목엘 들어가 지린내 땀내도 맡고 악다구니도 듣고 싸구려 하숙에서 마늘장수와 실랑이도 하고 젊은 군인부부 사랑싸움질 소리에 잠도 설치고 보니 세상은 아무래도 산 위에서 보는 것과 같지만은 않다. 지금 우리는 혹시 세상을 ..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