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년 전에 썼던 유아인 주연의 영화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감독 노동석) 리뷰를 다시 퍼왔습니다. 여기저기 굴러다니는 제 글을 좀 정리해야겠어요...
잘 쓴 리뷰는 아니지만....
그래도 리뷰 쓴다고 직접 영화 캡쳐도 하고....
(아우 귀찮아....)
글만 쓰는게 편하지요....
이 글은 3부로 나눠서 올렸던 건데 그걸 하나로 합쳤어요
그래서 무지 길어졌습니다.
감안하고 봐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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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리뷰는 영화에 대한 리뷰이지 유아인이라는 한 배우에 대한 리뷰는 아닙니다. 또 워낙 뭔가를 핥거나 오글거리는 글을 쓰는 취향이 아니라서 어쩌면 바싹 마른 오징어같이 건조한 리뷰가 될 수도 있습니다.
내가 쓰고 싶은 글이 나오지 않아 열 번은 쓰고 지우고 고치고 지우고를 계속 한 것 같아요. 이렇게 오랫동안 숙제를 해본 적이 없는데... 그만큼 어떤 말을 꺼내기가 쉽지 않은 영화라서 그럴까요.
또, 의미 단위로 끊어 쓰는 것은 제가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요. 문단 단위로 줄바꿈을 하기 때문에 웹상에서 여백 없이 올라온 글을 읽는 것이 힘들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글을 막 끊어서 쓰고 싶지는 않아요. 제 고집을 이해해주세요.
아무튼 예고를 띄운 지 열흘도 넘게 지나서 겨우 공개하게 되었습니다. 죄송하고 또 고맙습니다. 아인아~ 누님 마음을 받아주련... ㅇ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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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런데 종대 엄마는 어떻게 되었을까?
영화의 끝.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그 장면. 왕가위 감독의 ‘타락천사’에서도 그 길을 보았다. 사랑으로 상처를 입고 새롭게 짝지은 커플이 떠나는 그 길도 그렇게 끝없이 이어져 있었다. 세상을 좇지 않으려고 외로운 청춘을 살아가던 그들. 그런데 왜 길이어야 했을까? 삶이란 고여 있지 않고 계속 흘러가야 한다는 의미인가. 모든 사람이 다 행복하지 않더라도 영화는 끝이 나고, 영화가 끝이 나더라도 그들은 그 길을 계속 가겠지.
왕가위 감독 <타락천사> 이가흔, 금성무
(사진을 캡쳐해주신 유아인갤러리 벌레횽 감사합니다.)
그런데......
남아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 걸까. 이미 모든 가족들에게 버림받고 배신당한 그 엄마는 어떻게 살아갈까. 기수의 형과 형수는 무엇을 하고 지낼까. 엄마는 종대를, 아니 종대는 엄마를 정말 포기한 것일까. 기수 형네 가족은 다시 모일 수 있는 것일까.
2. 靑春, 靑春?
[느닷없이 궁금한 점]
이 영화의 포스터에서 가장 중요한 문구. 청춘이 무사한지를 묻고 있다니, 이 영화에서는 ‘청춘’을 지나치는 시간이 아니라 지켜내야 하는 시간으로 여기는 건가?
기수(김병석)와 종대(유아인)은 서울 마포의 소외된 흔적 속에서 살고 있다. 사라진 기찻길은 더 이상 그들을 넓은 세상으로 데려가지 못한다. 기수와 종대의 삶은 그렇게 낡은 도시의 뒷골목에서 고여 있다.
어디선가 본 듯한 이 익숙한 상황에서 나는 자연스럽게 프란시스 F. 코폴라의 ‘아웃사이더’를 떠올리게 되었다.
[익숙한 그 상황 / 프란시스 F. 코폴라 <아웃사이더>]
이 영화의 배경인 오클라호마의 한 도시는 남쪽 마을의 부자 백인 마을과 북쪽 마을의 가난한 백인 마을로 나누어져 있었다. 대부분의 청춘 영화가 그러하듯이 이 영화도 북쪽 마을의 가난한 청년들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이 영화에서 청춘들의 방황의 중심에는 사회적 ‘다름’에서 오는 갈등이 있었다. 주인공 포니보이(토마스 하우웰)는 가난하지만 그 나름대로의 질서 가운데에서 살아왔다. 우연히 다른 세상을 살아온 여자를 알게 되고, 그녀를 통해 벽 너머의 다른 세계를 경험하면서 세상에는 또 다른 질서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문제는 세상은 빈촌의 질서가 아닌, 다른 세계의 질서를 그들에게 들이댔다는 것. 포니보이와 친구들은 굴복하지 않기 위해 어설픈 저항을 하게 되지만, 세상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그 어설픔은 결국 비극적 결과를 낳게 된다. 부자 백인 마을의 무리들과 충돌하고 도방치는 과정에서 두 명의 친구가 죽게 된 것이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 없이 다른 질서 앞에서 큰 슬픔을 겪게 된 포니보이. 그 슬픔 뒤에도 여전히 아침이 찾아 오고, 그 햇살을 바라보며 포니보이는 소년에서 청년으로 성장해간다.
(왼쪽 뒷줄부터 시계방향) 패트릭 스웨이지, 맷 딜런, 롭 로위, 탐 크루즈, 토마스 하우웰(주인공), 랄프마치오(내 청소년기를 불사르게 했던 그 배우), 에밀리오 에스테베즈(마틴쉰의 아들이자 찰리쉰의 형, 요새는 감독이 되었더군요)의 풋풋한 신인 때의 모습, 그리고 <대부>의 감독 코폴라가 메가폰을 잡았던, 1983년 작 아웃사이더.
[아웃사이더와 우내없]
팽창하는 도시가 감추고 싶어하는 뒷골목에서의 우정과 청춘이라는 그 익숙함은 아마도 <아웃사이더>라는 영화 때문이었던 것 같다. 서로 다른 사회의 충돌로 인해 발생한 갈등의 방향을 횡적이라 말한다면, <아웃사이더>에서는 종적인 갈등, 즉 세대간의 갈등은 크게 부각되지 않는다. 친구와의 우정, 새로운 만남과 신선함, 같은 도시에 사는 부촌의 아이들과의 충돌 등으로 둥지를 떠나 더 큰 세계로 날아가야 하는 소년들의 진통과 성장을 보여줄 뿐이다.
<우내없>에서는 그 진통과 성장이 조금 다르게 표현되고 있다. 기수와 종대의 진통은 횡적 방향보다는 종적 방향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그들에게는 '가족'이라는 이름 자체의 중력만으로도 너무나 버겁다. 기수는 형수가 가출을 한 후 무기력한 생활을 하는 형을 대신하여 조카 요한과 함께 생활하게 된다. 기수는 드러머로 음악을 꿈꾸지만, 현실은 대리운전과 조카를 돌보는 일로 하루하루가 힘들다. 종대는 어려서 아버지의 배신으로 집을 잃게 된다. 어머니는 그 상실감을 지나친 집착으로 채워 나간다. 하나뿐인 아들 종대에 대한 집착, 또 자신을 지켜낼 수 없다는 불안감에서 오는 종교적 광신의 태도. 그리고 성적인 집착. 이 모든 것은 기수와 종대를 얽매는 또 하나의 무게다.
기수는 이러한 현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듯하다. 하지만 종대는 이러한 현실에 대해 자기 방식대로 반항한다. 어려서 있었던 작은 사고로 그는 신체적 결함을 갖게 된다. 스스로 남성성을 잃었다고 생각하는 그는 자신을 지키는 방법으로 실탄이 나가는 진짜 총을 갈망한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종대에게 '총'은 꼭 '총'이 아니어도 상관없었다는 생각이 든다. 진짜 총을 사려다가 사기를 당하고 빌린 돈까지 다 잃은 그는 절망의 바닥에서 '안마시술소'에 취직하여 일을 시작한다. 그는 총 대신 기성세대의 돈맛을 알게 된다. <아웃사이더>의 주인공들이 부촌의 한 여자를 통해 다른 세계를 경험하게 되었다면, 종대는 악랄한 기성세대 '김사장'을 통해 다른 세계에 첫 걸음을 내딛는다. 그 순간부터 종대는 총에 대한 집착이 사라졌고, 그는 기성세대에게 길들여가고 있었다.
[느닷없이 떠오르는 영화, 리들리 스콧의 '델마와 루이스']
평범한 생활을 하던 델마는 남편에게 시달리는 생활에서 잠시 벗어나 독신인 웨이트리스 루이스와 함께 여행을 간다. 그러나 시골 조그만 술집 주차장에서 폭행 당할 뻔한 델마를 구하기 위해 루이스는 총을 쏘면서 살인을 하게 되고 둘은 멕시코로 도망가기로 한다. 비록 도망자 신세였지만 평범한 삶에서 벗어날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델마는 총 한 자루로 그 지긋한 현실에서 탈출하면서 그녀는 스스로의 삶을 선택하는 용기를 갖는다.
총 한 자루로 자신을 바로 세우는 용기를 얻게 되는 델마와 다르게 종대에게 총은 위험한 어른 장난감일 뿐이었다. 나약한 자신을 채우기 위해 총이 필요했지만, 굳이 총이 아니어도 상관 없었다. 총보다 더 무서운 김사장이 자신을 돌봐주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좁고 어두운 뒷골목에서 종대가 의지했던 기수와 다르게, 김사장은 어른이었고 골목이 아닌 더 큰 세계를 보여주었다. 또 기수가 '내일'을 보여주었다면 김사장은 20년 후, 30년 후를 보여주는 것 같았다. 종대는 골목에 심겨져 있던 자신의 뿌리를 뽑아내어 김사장 옆으로 온다. 기수도, 엄마도 다 털어버리려 한다. 그 그늘이 단단해 보였기 때문이겠지.
[기수 그리고 아버지]
기수의 형은 기수가 어떻게 사는지 뻔히 알면서도 어린 아들을 맡겨놓고 사라진다. 종대의 아버지는 어려서 가족을 속이고 집을 빼앗았고 종대의 어머니는 늘 종대의 삶을 질기게 붙들고 있다. 종대에게 가족은 덜어내고 싶은 마음의 짐이었지만, 쉽게 엄마 곁을 떠나는 모습에서 종대에게 가족은 또 그리 큰 의미는 아니었던 것 같다. 그러나 기수는 조금 다르다. 형 대신 맡게 된 조카 요한이를 기수는 힘들지 않게 거둔다. 몽유병에 걸린 요한이 때문에 드럼 세션 참여도 포기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는 스스로 포기하고 아무도 원망하지 않는다. 요한이보다 훨씬 크지만 여전히 철이 없는 종대 역시 기수가 거둬야 하는 동생이었다. 기수는 그렇게 묵묵하게 타인을 위한 기둥이 되어주고 있었다.
요한이와 기수, 기수의 형이 함께 자는 모습이다.
보통 아버지가 아들 옆에서 자기 마련인데
이 장면은 오히려 삼촌인 기수가 요한이 옆에서 잠을 자고
아버지는 아들과 떨어져 있다.
기수는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말을 한다. 그에게 좋은 사람의 의미는 무엇일까. 아버지처럼 뒤에서 묵묵히 기둥이 되어 주는 그런 존재였을까. 솔직히 지금도 기수라는 캐릭터를 이해하는 것이 힘들다. 특히 기수의 종대를 향한 배려와 희생이 더욱 그랬다. 물론 종대의 신체적 결함이 어린 시절 기수 의 실수때문이라는 죄책감도 조금은 있을 수 있겠지만 그러기에는 그의 희생은 밑도 끝도 없이 크고 깊었다.
기수가 유일하게 요한에게 화를 내는 장면이 있다. 자고 있는 요한이를 깨워 '너네 엄마 아빠는 쓰레기야. 너네 아빠는 허접쓰레기고 너네 엄마는 창녀야.'라며 악담을 쏟아낸다. 총을 사려다 사기를 당한 종대가 병원에 입원해 있는 상황에서 기수는 종대 엄마에게 쫓겨난다. 종대 엄마로부터 '애를 또 망칠 거냐는 원망 섞인 말을 들은 기수는 자신이 종대를 지켜줄 수 없다는 사실에 화가 난 것 같았다. 요한이 때문에 자신이 좋아하는 드럼 세션을 포기했을 때도, 종대가 총을 사겠다고 자신이 겨우 모은 돈을 빌려갔다가 사기를 당해 다 날려버렸을 때도 기수는 화를 내지 않았다. 그런데 종대 엄마 때문에 종대를 다치게 했던 과거를 떠올리고는 어린 요한이에게 자신의 상처를 다 퍼붓는 장면에서 기수의 절망은 종대를 돌보지 못하는 상황에서 오는 것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느닷없이 궁금한 점 / 기수에게 음악이란?]
기수는 음악을 좋아하고 드럼을 연주하는 뮤지션이다. 그런데 기수가 드럼을 치는 장면은 진지하긴 하지만 흥이 느껴지지 않는다. 기수에게 음악은 어떤 의미일까. 단지 그에게 지워진 고단한 현실을 부각시키기 위해 음악이라는 아이템을 사용한 것은 아닌가 싶어 조금 아쉽다. 기수와 음악, 그리고 무거운 현실, 이 세가지와 그의 책임감이 잘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음악을 하는 기수의 표정은 진지하지만 흥이 느껴지지 않는다.
음악을 할수록 현실의 무게만 더 느끼는 것처럼 보였다.
음악은 그저 기수에게 현실을 깨닫게 해주는 반면교사일 뿐인가.
기수가 음악을 더 절실하게 원했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몇년 전, 직장 회식 자리에서 내가 음악을 좋아한다고 했더니 어떤 부장님이 내 표정에서는 음악을 좋아하는지 어떤지를 느낄 수 없다는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그건 가짜라고.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은 그 흥이 다 드러난다고. 처음엔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몰라 고민을 조금 하긴 했지만, 가짜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그 이후에 '아는 음악'으로 나를 자랑하기보다는 '좋아하는 음악'으로 나를 담아내는 것이 진짜 음악을 좋아하는 내 모습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기수는 음악으로 어떤 자신을 담아내고 싶었던 것일까. 그 점이 궁금하다. 영화는 기수가 음악으로 자신을 표현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음악은 그냥 악세서리가 아니라 어떤 이에게는 삶 그 자체일 수도 있는데 기수에게 그 간절함이 잘 보이지 않는다. 그만큼 현실이 무겁다는 의미일 수도 있겠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 현실을 뚫고 가기 위해 총에 집착했던 종대와 반대로 기수에게는 음악이 간절하지 않다는 것이 균형이 잘 맞지 않아 보인다. 그래서 아쉽다.
[다시 돌아와서 / 기수 그리고 아버지]
어떤 일이 있어도 늘 잔잔했던 기수가 극한 분노를 드러낸 장면은 김사장을 찾아가 종대를 놓아달라고 협박할 때였다. 꼭 그래서는 아니겠지만 그 전에 종대 엄마는 기수를 찾아가 종대를 데려와 달라는 부탁을 한다. 어쩌면 기수는 엄마의 그 부탁에 더 큰 힘을 얻었을 수도 있다. '종대를 망쳐버린 나쁜 형'이 아니라 '종대를 구해낼 수 있는 유일한 존재'로 종대 엄마에게 인정받았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기수는 다시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종대를 찾아 나선다. 그러나 종대는 이미 철없이 어리기만 한 과거의 종대가 아니었다.
[종대와 정은 그리고 아버지]
김사장의 안마시술소에서 일을 하게 된 종대는 '정은'이라는 여자와 가까워진다. 정은은 종대처럼 밑바닥 인생을 사는 안마시술소의 직원이다. 높은 하이힐을 신고 남자손님을 받는 정은은 하는 일은 험하지만 마음은 순수하고 착하다. 유일한 아버지의 유품인 반지를 잃어버리고 안타까워 하는 정은을 보면서 종대는 묘한 감정을 느낀다. 종대에게 아버지는 그저 어머니를 울리고 술을 마시게 한 존재일 뿐이었지만 정은에게 아버지는, 그의 부재가 항상 가슴 아픈 그런 존재이다. 종대는 정은에게 아버지의 빈자리를 채워주고 싶어한다. 그런데 종대는 아버지가 어떤 사람인지 알지 못한다. 종대에게 아버지를 대신했던 인물은 기수와 김사장이다. 기수는 늘 묵묵히 믿어주고 함께 마음을 나누고 아파했던 존재이고, 김사장은 남자답고 멋있게 사는 것처럼 보여 부러운 존재였다. 기수를 떠나 김사장의 그늘로 들어갔지만 종대는 마치 기수가 종대에게 하듯이 정은을 돌봐준다.
하이힐을 벗고 종대의 발등에 올라가 함께 춤을 추는 장면은
너무 아름다워서 가슴이 아프다.
정은은 종대보다 머리 하나가 작다.
불균형스럽고 어색하지만
종대가 처음으로 정은에게 아버지의 자리를 대신 해주는 모습이라
마음 한 켠이 먹먹했다.
(어려서 아버지 발등에 올라가 함께 놀아본 사람들은 그 기분을 잘 알 것이다.)
김사장의 남자다움과 어른스러움이 좋다며 그의 그늘로 들어간 종대. 그렇지만 정은을 만나면서 종대는 기수와 같은 마음을 품게 된다. 더이상 김사장과 함께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종대는 정은을 통해 김사장의 비인간적인 면과 기수의 따뜻한 마음을 동시에 깨달은 것 같다.
아버지의 반지는 손가락에 잘 맞지 않아 자주 잃어버린다. 그날도 정은은 반지를 잃어버리고 종대에게 그 반지를 찾아 달라고 한다. 종대는 아버지의 빈 자리를 채워 주리라 생각하지만 정은은 남자손님의 호출에 불려 들어가고 무자비한 남자손님이 휘두른 폭력과 수치는 막아주지 못한다.
반지를 찾아 주겠다는 약속을 하지만, 종대는 자신의 무기력함에 절망한다.
비명을 지르는 정은을 구하기 위해 방으로 뛰어 들어갔지만 정은은 이미 기절한 상태였고 종대는 만취한 그 남자손님을 쓰러뜨린다. 그리고 그 남자손님이 가지고 있는 진짜 총을 우연히 손에 넣게 되고 자신과 정은을 방어하기 위해 그는 사람에게 총을 쏜다. 또 때마침 찾아 온 기수는 종대를 구하기 위해 김사장을 병으로 쳐 쓰러뜨린다. 불쌍한 세 청춘은 순식간에 밑바닥의 절망으로 휘몰아 들어가게 된 것이다.
[종대와 요한 그리고 어머니]
김사장을 쓰러뜨리고(죽였나?) 종대를 구한 기수는 안마소 직원에게 총을 쏜 종대의 죄까지 자신이 짊어지겠다고 한다. 대신 종대는 형이 적어 준 요한의 엄마 주소를 쥐어주며 요한을 엄마에게 데려다 주라고 한다. 물론 종대는 당연히 자신이 대신 잡혀가겠다고 큰소리를 치지만 기수는 침착하게 종대를 설득한다.
-넌 내 꿈이야......어딜 가서도 꿈을 버리지 마
-근데 왜 형은 나를 놓는데?
-나보다 네가 더 소중하니까...... 알지....?..... 약속했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아직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종대는 기수의 꿈이다. (그런데 종대는 기수의 어떤 꿈인가?) 종대는 기수보다 더 소중하다.(왜 종대는 기수보다 더 소중한가?) 그런데 종대에게 짐스러운 조카를 떠넘기는가?
오히려 나는 음악과 가족, 종대라는 실타래가 뒤엉켜있는 기수의 삶에서 기수 스스로 풀기 어려웠던 큰 매듭이 경찰에게 자수하러 가면서 싹둑 잘려 나가는 후련함을 느꼈다. 더 사악하게 생각하면 지금까지 자기가 담아두었던 아버지의 마음을 모두 종대에게 떠넘기는 것 같아 혹시 종대에 대한 복수가 아닐까하는 생각까지 하기도 했다. 마치 빚더미에 오른 아버지가 갑자기 지병으로 임종하기 직전에 장남에게 가족들을 부탁하고 떠나는 그런 느낌인 듯 싶다.
[느닷없이 떠오른 영화 <길버트 그레이프>]
아이오아주 작은 도시에서 살고 있는 길버트 그레이프는 18세라는 어린 나이에 혼자 가정을 떠받들어야 하는 힘든 상황에서 하루하루 지쳐간다. 아버지의 자살 이후 움직이지 않고 먹기만 하는 '고래'같은 엄마, 정신 연령이 낮아 언제 사고칠 지 모르는 동생 어니, 그리고 나이 많은 누나와 철 없는 여동생, 이 모든 가족들은 하나같이 길버트의 고민거리 들이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이 지루하고 동네 카버 부인과의 불륜 관계도 그에게는 자극적이지 않다.
그러다가 캠핑카를 타고 동네로 여행 온 또래 여자 베키를 만난 후 길버트는 그동안 쉬게 했던 온 몸의 감각들을 되살려낸다. 그렇지만 무기력한 생활에서 길버트를 구해낸 더 근본적인 이유는 '베키와의 만남'이 아니라 '어머니의 죽음'이었다. 어머니가 죽자 거구인 어머니를 도저히 집밖으로 옮기기도 어렵고 억지로 꺼낸다 해도 동네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 뻔했다. 그래서 그는 그 지긋지긋한 집과 함께 어머니를 화장시킨다. 그리고 다시 찾은 베키의 캠핑카를 타고 처음으로 그 마을을 떠나 여행을 간다.
'가족'이 삶의 희망이 되고 '가족'이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주는 상황은, 중산층의 안정된 삶에서나 가능하지 않을까.길버트에게 '가족'은 삶의 방향조차 살필 틈을 주지 않는 걸림돌일 수도 있고 종대나 기수에게서처럼 뛰어 오르지 못하게 붙잡는 끈질긴 중력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족'이라는 공동체 안에서 함께 생활하고 견뎌내라고 세상은 강요한다. 길버트는 그래도 어머니의 따뜻한 마음을 알게 되었고, 그렇게 편하게 어머니를 떠나보낼 수 있었다. 베키의 캠핑카를 타고 떠나는 길버트는 그 마음의 여유에서 오는 에너지로 를 더욱 충실하게 돌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기수는 종대에게 아버지의 역할을 해주었다. 그들은 진짜 가족은 아니지만 그보다 더 진한 유사가족의 유대감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기수는 종대의 죄까지 대신 짊어지고 그들의 삶에서 떠나버린다. 이제 기수가 했던 그 아버지의 역할을 종대가 대신해야 한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보이는 새로운 유사가족의 여행은, 길버트에게처럼 자신을 위한 홀가분한 여행이 아니다. 요한의 엄마를 찾기 위해 떠나는 여행은 종대에게 새로운 책임감을 갖게 한다. 종대는 그렇게 어른이 되어 가고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 '요한'과 '종대'의 관계를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종대는 요한을 처음 만났을 때는 요한에게 관심조차 없었다. 그런데 기수가 어쩔 수 없이 요한을 혼자 두고 문을 잠그고 외출한 사실을 알게 되고 어린 시절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며 요한에게 동질감을 느끼며 가까워진다. 실제로 종대의 어린 시절과 요한은 모두 같은 아역배우(이동호)가 연기를 한다. 다시 말해 요한은 종대의 어린 시절이며 종대는 요한의 미래의 모습이라 생각할 수 있다.
만약 기수가 단순하게 종대에게 요한을 부탁하고 떠났다면 그 나름대로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기수는 종대에게 엄마를 찾아주라고 하고 주소까지 전해준다. (주소는 이전에 형이 알려준 것 같다. 주소가 있으니 요한은 엄마와 생각보다 쉽게 만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그들은 요한의 엄마를 찾아서 함께 길을 떠난다. 종대와 정은, 요한으로 구성된 유사가족은, 요한이 진짜 엄마를 만나게 되면 깨지는 시한부 가족인 셈이다.
왜 기수는 요한에게 엄마를 찾아주려는 생각을 했을까? 아니, 이것은 기수에게보다 감독에게 해야 할 질문일 수도 있다. 어린 요한에게는 친엄마가 꼭 필요하다 생각해서였을까? 종대의 어머니가 종대에게 어떤 마음의 짐을 지게 했는지 뻔히 다 보여줘놓고, 요한을 버리고 떠난 친엄마에게 요한을 데려다주는 엔딩은 어떤 의도였는지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리뷰를 시작했던 첫머리에서, 나는 남은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궁금해 했다. 종대에게는 어머니, 요한에게는 엄마와 아빠, 이 친가족들은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아니, 다시 만나야만 할까? 그들에게 친가족은 '삶의 희망'이나 '울타리'가 아니라 서로 버리고 상처 주고 더 외롭게 하는 존재들이었다. (정은에게만은 아버지가 소중한 사람으로 기억되고 있긴 하다.) 요한이 친엄마와 함께 살게 되더라도 자라면서 자기를 버린 엄마를 종대와 같은 마음으로 버거워 할 것이다. 종대도 그 마음을 알고 있겠지. 종대는 요한의 엄마를 찾아주면서 자신의 엄마를 떠올릴테고 요한이 엄마에게 돌아간 것처럼 종대도 엄마에게 돌아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것이 이 영화에서 원하는 청춘의 엔딩이었나 생각하면 좀 싱겁고 실망스럽다. 방황하는 청춘의 끝은 결국 가족인가?
[느닷없이 궁금한 점 / ‘가족’이 없으면 우리에게 내일은 없는 걸까?]
이 리뷰의 특징은 '청춘의 방황'이 아니라 '가족의 의미'를 짚어낸 것이라 하겠다. '델마와 루이스'를 제외한 비교대상인 영화들은 대부분 청춘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모두 외화이기 때문에 한국적인 청춘 영화와 다른 점이 많이 있다. 그렇지만 한국적인 청춘 영화의 엔딩이 결국 친가족을 찾아 떠나는 여행이라면, 결국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는 청춘영화를 가장한 가족 이데올로기를 강조하는 영화로 비춰질 수 있지 않을까. '청춘은 무사한가요'라는 문구에서 청춘이라는 시기를 무사히 지켜내야 하는 것으로 봤다면 그들이 지켜내야 할 것은 결국 가족의 희생과 사랑이라는 것인지....
영화 전반에 걸친 우울한 습기들이 화면에 잘 묻어나왔고 우리는 기수와 종대의 아픈 청춘에 함께 눈물을 흘렸다. 충분히 감성적이고 그 감성을 충분히 잘 잡아낸 화면이었다. 그런데 내러티브 전반에 걸쳐 퍼즐 조각이 잘 맞지 않은 기분이 든다. 좁은 골목에서 철없이 놀던 소년이 어른으로 성장해가는, 아니 성장해야만 하는 진통과 아픔을 진하게 보여주려 했다면 그 한 가지에 집중해야 하지 않았을까.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는 처음과 끝이 잘 맞물리지 않은 채 지극히 한국적이면서도 평범하게 마무리해버려서 답이 없는 문제를 관객에게 성의 없이 던져버린 셈이 되었다. 가족이라는 이미지를 영화 안에 뒤섞어 버림으로서 영화는 중심을 잃고 흔들려 버리고 만 것이다.
3. 靑春, 家族?
청춘은 어디로 가고 '좋은 사람'이라는 애어른이 되어야 하는 기수와 종대의 현실. 그 현실이 아픈 청춘보다 더 쓰리다. 굳이 가족을 버무리지 않았다면 그 슬픔이 그런대로 아물 수 있는 여지가 있을 법도 했을텐데, 다시 가족의 굴레로 돌아가야 한다면 영영 낫지 않을 수도 있을 것 같아 안타깝다. <타락천사>에서 가흔(이가흔)과 하지무(금성무)가 서로의 사랑을 잃은 상처를 안은 채 함께 떠나는 길과 같이, 엔딩에서 나오는 그 길이 요한의 엄마가 있는 대전으로 이어진 것이 아니라 서로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따뜻한 곳을 향해 뻗어있는 길이기를 희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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