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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 그리고 잔소리

[영화리뷰] 중경삼림







제 인생에서 영화는 중경삼림 이전과 중경삼림 이후로 나뉘는데, 첫 번째 이유로는 중경삼림 이전에는 중화권 영화나 드라마를 거의 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명절 때 티비에 나오는 성룡의 영화 빼고는...)


처음엔 왕가위 감독의 영화를 중심으로,

그 다음엔 금성무, 임청하, 양조위라는 배우들이 나오는 영화를 중심으로,

이것이 점점 확대되면서 양조위가 나오는 80년대 드라마 (으흑... 이거 구해 보느라 엄청 고생했었죠... ),

그리고 양조위의 친구인 주성치... 4대천왕 4소천왕 오빠들의 영화 등등... ㅋㅋㅋ



두 번째로는 영화를 선택하는 기준이 달라졌다는 것입니다.
중경삼림 이전에는 '영화'라 하면 어떠한 사건이 인과적으로 연결되며

갈등이 발전-해결하는 방식으로 흘러가는 서사적인 방식만을 떠올렸었습니다.

그러나 중경삼림의 특징들,

대사나 행동 중심의 장면들은 과감히 생략되고

배경의 색감이나 흔들리는 촬영 기법 (핸드헬드), 진한 음악과 인물들의 표정만으로

주인공들의 외로움을 전달하는 방식에 꽤 충격을 받게 되었습니다.

(사실 그 전까지는 스토리 중심으로 흘러가는, 내용 파악이 쉬운 영화 중심으로 봤었기 때문에... ㅎㅎ)




무엇보다도 상징적은 소재들을 반복적으로 보여주지만

그 의미를 절대 대사로 처리해서 쉽게 알려주지 않는 방식이 신선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이후로는 영화를 가리지 않고 보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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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성무-임청하가 주인공인 에피소드와 양조위-왕비가 주인공인 에피소드 두 개가 옴니버스로 연결되어 있는데,

'캘리포니아 드림'으로 유명한 두 번째 에피소드보다

저는 첫 번째 에피를 더 좋아했습니다.

두 번째 에피는 그래도 스토리가 흘러가는 것이 보였지만,

실연당한 금성무와 조직으로부터 배신당한 임청하의 우연한 만남으로 이어지는 첫 번째 에피는

볼 때마다 숨어 있는 장면을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볼 때마다 이 영화를 통해 느낄 수 있는 - '알 수 있는'이 아님- 의미는 점점 풍성해질 수 있었죠.

지금 다시 봐도 설레는 장면이 많아요 ㅎㅎ




암튼 스토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5월 1일은 금성무의 생일입니다. 그런데 이 날짜는 임청하에게 배신당한 조직으로부터 통보 받은, 자기 목숨을 지킬 수 있는 마지막 기한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실연당한 여자를 잊기 위해, 금성무는 그동안 5월 1일 기한의 통조림을 버림 받은 자신과 동일시하며 30개나 모으게 됩니다.




사랑에 기한이 있다는 것을 마음 아파 하며 금성무는 파인애플 통조림 30개를 모아 한 번에 먹어치웁니다.




사실 생일에 자신을 만나줄 사람을 찾기 위해 전화를 하는 장면이 꽤 많이 나옵니다.

그러나 매번 거절당하죠.

그래서 그는 술집에 맨 처음 들어온 여자를 무작정 사랑하기로 합니다.

그 순간 조직에게 쫓겨 다니느라 목숨이 위태로운 임청하가 지친 몸으로 바의 문을 열고 들어오고,

금성무는 그녀에게 접근합니다.




며칠 동안 조직에게 쫓겨다니던 임청하는 너무나 피곤했고,

잠이 든 그녀를 금성무는 살뜰히 보살펴 줍니다.


제가 이 영화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면이 금성무가 임청하의 구두를 닦아주는 부분입니다.

(그것도 자신의 넥타이로!!!) 그가 그녀의 상황을 알 리가 없었겠지만,

세심한 남자의 따뜻한 마음은 임청하의 마음도 움직이게 했던 것이죠.






그리고 임청하가 깨어나기 전 그는 먼저 떠나,

외로움의 눈물을 흘리지 않기 위해 운동장을 달립니다.

(땀을 흘리면 눈물이 나지 않을 거라는 게 그의 생각 ㅎㅎ)

그리고 아무에게도 연락이 오지 않을 거라 생각하고 삐삐를 운동장에 버리고 갑니다.




그런데 몇 걸음 가지 않아 이 삐삐가 울립니다.

그리고 임청하에게로부터 생일 축하의 메시지를 받게 됩니다.



그리고 이 영화에서 유명한 대사가 나오죠....


기억이 통조림에 들었다면...


기한이 영영 지나지 않기를 바란다....


꼭 기한을 적어야 한다면...


만 년 후로 적어야지.....



영원한 사랑을 찾았던 금성무는 (그의 삐삐 암호가 바로 '영원히 널 사랑해' 이거든요.)

그렇게 유통 기한이 끝나 버려지는 통조림과 같은 자신의 처지를 깨닫고 절망합니다.

그리고 아주 우연히 만난, 이름조차 모르는 여인을 즉흥적으로 사랑해보기로 결심하죠.

인스턴트 음식처럼 말이죠...


그러나 금성무가 임청하의 구두를 소중히 닦아줬듯이

임청하는 생일 축하한다는 간단한 메시지로 금성무의 빈 마음을 채워줍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스치듯이 잠깐 만난 여인에게서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를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기억에도 기한이 있다면 그 기한을 만 년 후로 적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마지막 대사가 주는 여운은 강렬하지는 않아도 조금씩 마음을 젖게 하는 것 같습니다.



*** 사실 이 대사는 주성치의 영화 <서유기-선리기연>에서 패러디 됩니다.



<중경삼림>에서는 실의에 빠진 금성무가 큰 위로를 받으며 사랑에 대해 새롭게 새기게 되는 내용인데,

<서유기-선리기연>에서는 주성치가 인간사의 한을 없애기 위해

삼장법사를 돕는 손오공이 되기를 자처하며, 개인의 희노애락을 내려놓고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사랑을 포기하는 슬픈 장면에 이 대사를 담아 냅니다.




학창 시절 사진 앨범을 꺼내 들듯이

그렇게 중경삼림과 서유기 선리기연을 꺼내들어 봤습니다.

사실 캡쳐를 하기 위해 한번 돌려봤을 뿐인데 여전히 제 마음을 설레게 하네요.

진정한 사랑엔 과연 유통 기한이 있는 걸까요....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