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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 사랑, 문학/[광장,청춘], [예스31],[ccmer] 칼럼

모성(母性) (2013.2.27)

, 사랑, 문학

제목 : 모성(母性)


컴퓨터를 뒤지다가 오래전 쓰고 올리지 않은 글을 발견하여 뒤늦게 올려봅니다.

2013년 2월 27일에 저장한 파일로 되어 있네요

 


어디서 나왔을까 깊은 산길

갓 태어난 듯한 다람쥐새끼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고 있다

그 맑은 눈빛 앞에서

나는 아무것도 고집할 수가 없다

세상의 모든 어린 것들은

내 앞에서 눈부신 꼬리를 쳐들고

나를 어미라 부른다.

괜히 가슴이 저릿저릿한 게

핑그르르 굳었던 젖이 돈다

젖이 차 올라 겨드랑이까지 찡해오면

지금쯤 내 어린것은

얼마나 젖이 그리울까

울면서 젖을 짜버리던 생각이 문득 난다

도망갈 생각조차 하지 않는

난만한 그 눈동자,

너를 떠나서는 아무데도 갈 수 없다고

갈 수도 없다고

나는 오르던 산길을 내려오고 만다

, 물웅덩이에는 무사한 송사리떼

-나희덕 <어린것>

 

육아의 과정은 남자들이 군대 이야기만큼 할 말이 많습니다. 저는 17개월 터울의 두 아이를 키우면서 가정 안팎의 일들로 힘든 시간을 보냈었습니다. 사람들 만나는 걸 좋아하는 외향적 성격인데다가 사회적 관계 안에서 존재감을 크게 느끼는 편인데 그 당시에는 연년생 두 아이의 육아를 전담하게 되면서 집안에 갇혀 하루 종일 말 못 하는 두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야만 했지요. 게다가 말도 늦고 그래서 기저귀도 제 때 떼지 못한 세 살 큰 아이와 갓난아기 둘째가 동시에 사고를 치게 되면 저는 힘들고 피곤한 상황으로 인해 짜증이 발끝에서부터 머리끝까지 치솟아 올랐습니다. 특히 몸과 머리는 점점 커지는데 말이 늦되었던 큰 아이는 자기의 요구를 표현하지 못해서 거의 하루 종일 징징거리며 울어댔습니다. 답답한 저는 아이를 다그치고 혼내기 일쑤였고 가끔은 집밖에서도 아이를 때리거나 소리를 질러 혼을 내기도 했습니다.

그날도 불같이 화를 내는 제 목소리에 당시 세 살이었던 큰 아이는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그 아이는 누군가에게 위로를 받고 싶었던지 바로 제 품에 와서 안기는 것입니다. 바로 직전까지 자기에게 소리를 지르고 자기 마음을 상하게 한 당사자가 바로 저였는데도 이 아이는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나 봅니다. 그냥 저에게 위로를 받고 싶었던 것입니다. 왜냐면 저는 엄마였으니까요. 그리고 제 품에 안긴 아이의 체온으로 제 마음도 함께 위로를 받았습니다. 누군가에게 엄마로서 존재한다는 건 그 아이가 힘들 때 제일 처음 찾아오는 존재로서 증명되는 것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이후 제가 왜 화가 났는지를 처음부터 생각해 보았습니다. 일단 제가 힘들고 지친 상태에서 짜증이 나는 건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을 겁니다. 그런데 그 감정을 아이에게 풀어낸 것은 잘못된 행동이었던 거죠. 그것은 말 못하는 아이가 저에게 징징거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저도 아이에게 제 감정을 알아달라고 징징거리는 모습과 다를 바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조금이라도 성숙한 모습을 보여야 할 어른이 말 못하는 아이처럼 감정을 솔직하게 말하지 못하고 이렇게 화를 내면 아이가 내 감정을 이해해서 나를 좀 편하게 해주겠지.’ 하는 어린 아이 같은 생각을 했던 겁니다.

그 다음부터 아이가 저에게 울먹이고 징징거릴 때 제 분노를 참아내고 대신 아이에게 울지 말고 뽀뽀나 사랑해라는 말을 열 번 말해주면 그 일을 해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아이는 웃으며 뽀뽀를 하거나 발음도 안 되는 따라앙을 열 번씩 제 귀에 말해주었습니다. 여전히 저는 화를 잘 내고 분노를 참지 못해 아이에게 소리를 질러댄 적도 많았지만 그 전과는 다르게 횟수가 많이 줄어들었고 큰 아이와 서먹했던 저는 정서적 거리가 많이 가까워지게 되었습니다.

 

우리 가족은 평소 화목하고 관계가 좋은 편인데 제 감정이 좋지 않아 화를 내거나 소리를 지르는 순간 분위기가 엉망이 됩니다. 우리 가정의 화평을 위해서는 엄마이자 아내인 나 자신이 행복해져야 했습니다. 무조건적인 희생과 헌신이 우리 가정을 위하는 길이라 생각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런 희생과 헌신이 오히려 제 마음과 감정을 상하게 했고, 또 그런 상한 마음으로는 우리 가정 역시 행복해질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둘째가 아직 17개월밖에 안 되었을 때 이 아이들을 어린이집으로 보내고 다시 직장(학교)에 나갔습니다. 학교에서 근무할 때는 중간 중간 공강 시간이 있기 때문에 그 시간에 책도 보고 수업 준비도 하면서 충분히 제 시간을 즐길 수가 있었습니다. 퇴근 후 집에 왔을 때 몸은 많이 피곤했지만 마음은 안정되었기 때문에 아이들과의 저녁 시간을 즐겁게 보낼 수 있었습니다. 어린 것들을 떼어 놓고 차마 직장에 나갈 수가 없다는 엄마들도 있겠지만 저는 제가 행복해져야만 저와 우리 가정이 살 수 있었기 때문에 아픈 마음을 묻어두고 다시 일을 하기로 한 것입니다. 아이를 낳기 전에는 학교 근무가 너무 육체적으로도 너무 힘들고 어려웠는데 다시 출근을 하게 되니 그 출근길이 정말 행복하고 즐겁게 느껴지는 것이었습니다. 다행히 어린이집에 잘 적응한 우리 아이들은 두 녀석이 동시에 말을 배우고 기저귀도 떼게 되었습니다.

 

아이가 자라듯이 엄마로서의 저도 그렇게 하나씩 배워나갔습니다. 지금도 계속 고민하고 배워가고 있고요. 여전히 화를 내고 소리를 질러서 아이들이 얼굴이 하얗게 질릴 때도 많지만 아이들은 여전히 저를 좋아하고 따릅니다. 물론 6학년이 되는 큰 아이는 요새 살살 저를 피하기도 하지만 막상 제가 머리를 쓰다듬어 주거나 안아줄 때는 정말 좋아하면서 품 안에 폭 안깁니다. 둘째는 말할 것도 없지요.

 

예전이나 지금이나 좋은 엄마나 최고의 엄마가 되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대신 행복한 나가 되고 싶은 마음이 더 큽니다. 그래서 지금도 저는 제가 할 수 있는 만큼만 집안일을 하고 제가 할 수 있는 만큼만 아이들을 돌봅니다. 주말에는 일부러 아이들을 남편에게 맡기고 친구들을 만나러 나갑니다. 아빠가 아이들을 잘 돌보던 못 돌보던, 인스턴트 음식을 사 먹이건 하루 종일 텔레비전을 보여주건 저는 크게 신경 쓰지 않습니다. 저만 귀찮게 하지 않으면 다 괜찮습니다. 그렇게라도 저는 제가 행복해져야 한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요. 완벽한 엄마로 살아야 한다는 강박증에서 벗어나는 순간 저 뿐만 아니라 우리 가정이 모두 행복해졌기 때문입니다. 어떤 엄마들은 아이들이 행복한 모습을 보면 자기가 행복해진다는 말을 하지만 솔직히 저는 일단 제가 먼저 행복해지고 싶습니다. 이것이 제 모성의 특별한 모습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모성(母性)이라는 말처럼 절대적인 아름다움을 가진 단어가 있을까요. 그러나 반대로 이 말처럼 여자의 삶을 얽매는 단어도 없을 것입니다. 모성은 당연히 숭고하고 아름다운 말이지요. 그렇지만 여러분이 생각하는 모성이 여성의 희생을 바탕으로 하는 가정의 평화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문화 안에서 드러나는 차별적 시선의 결과입니다. 이런 분위기 때문에 일부 엄마들은 스스로를 비하합니다. 다른 엄마들과 비교해서 자기는 늘 부족한 것 같다는 생각에 지나치게 육아에 매달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늘 나의 가장 나쁜 모습과 타인의 가장 좋은 모습을 비교하기 때문에 오는 좌절인 것이죠. 행동하고 채워줘야만 좋은 엄마는 아닐 것입니다. 이제 그만 자신을 용서하고 이제부터 행복해지기로 다짐해보세요. 엄마가 행복해야 아이들도 스스로 행복이 어떤 건지 알게 되고 가정도 그 행복을 누릴 수 있으니까요.



둘째 태어난지 얼마 안 돼서 둘이 함께 낮잠 자는 모습